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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나혜석, 예술과 편견

(서울=연합뉴스) "동경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생으로 변호사 김우영 씨의 부인 나혜석 여사는 대정 칠 년에 동경에서 돌아온 후로 이래 묵묵히 삼사 개년을 지내오더니 이번 처음으로 개인 전람회를 열고 그동안 오랫동안 모아 두었던 유회(油繪) 육칠십 점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관람케 하여 양화로는 아직 적적한 우리 조선에 양화의 어떠한 것인 것을 소개하는 동시에 일반에게 미술에 대한 관념을 보급시키고자한다 하며…여자로서 전람회를 열기는 여사가 조선에서 처음이라 할 것이오 또 조선 미술계에 여자로는 일류라 할지라…" (동아일보 1921. 3. 18. '양화가 나혜석 여사 개인 전람회를 개최')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 원효로 서울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한 행려병자가 생을 마감했다. 사망진단서에는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은 65~66세로 기재됐다.

이 행려병자가 바로 위 기사의 주인공, 신여성 나혜석이었다.

사망 당시 실제 나이는 52세. 병마와 굶주림으로 열 살 이상 들어 보였다.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초라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나혜석
나혜석

1921년 3월 19일과 20일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나혜석의 첫 개인전은 5천여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이 군수를 지낸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1913년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휴학하고 1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아 이듬해 복학했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여학생들의 만세 사건에 관여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첫 개인전을 연 후 1932년까지 해외 체류 기간을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과 입선을 놓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여자계' 발행을 주도했고, 여권론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다. 1918년 신여성이 낡은 사고를 하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담은 단편소설 '경희'를 쓰기도 했다.

연인이었던 시인 최승구가 1916년 결핵으로 사망하고,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조건으로 4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일생을 두고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이었다. 김우영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신혼여행 길에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들은 신문 광고란에 결혼 청첩장을 실었는데, 한국 최초의 공개적인 결혼 청첩으로 화제를 모았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0일 자 3면에 실린 청첩장에는 신랑 김우영과 신부 나혜석이 김필수 목사의 지도로 이날 오후 3시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나혜석 개인 전람회 개최 기사
나혜석 개인 전람회 개최 기사

유학 시절 나혜석과 교분을 쌓았던 소설가 염상섭은 이들의 결혼을 소재로 1924년 7월 자유연애와 신여성의 결혼을 다룬 소설 '해바라기'를 펴내기도 했다.

1922년 남편이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현재의 단둥) 부영사로 부임하자 나혜석은 6년 동안 그곳에서 화가로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교육사업을 벌이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운영했고, '안동현 부인친목회'를 조직했다. 부인친목회를 통해 기금을 모아 부인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했으며 여성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고 편물 등을 가르쳤다. 또한, 의열단의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자신의 여성관을 담은 글들을 발표해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김우영과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1923년 잡지 동명 1월호에 실린 '모(母)된 감상기'에서 자신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규정했다. 이는 여성만의 내밀한 경험을 처음 공론화시킨 것이었다.

1927년 부부는 유럽으로 떠났다. 3년 동안 유럽에서 체류하며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김우영은 독일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유럽여행은 나혜석에게 서구 여성들의 삶을 경험할 기회가 됐고,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이며 천도교 신파의 수장이자 김우영의 친구였던 최린과의 불륜으로 귀국 후 1930년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다.

나혜석은 1934년 '삼천리' 8~9월호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자신의 연애, 결혼, 이혼의 전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갖는 모순을 비판했다. 그는 남자는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자에게만 정조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고 했다. 정조라는 것은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의 문제이며, 정조관념이란 상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현모양처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나혜석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냉담해졌다. 나혜석은 1934년 9월 19일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고소내용은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였다.

자화상
자화상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소외를 겪어야 했다.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았으며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 연달아 입선하고 1933년 서울 시내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어 재기하는 듯했으나 실패했고, 화재로 그림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다. 1935년 서울 진고개 조선관에서 소품전을 개최했으나 외면당했다. 맏아들이 폐렴으로 죽자 나혜석은 일엽스님을 찾아가 수덕사 견성암과 수적여관에서 머물며 1943년까지 그림을 그렸다.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했다. 1946년 행인에게 발견돼 서울시립 남부병원에 입원했다. 1948년 11월 서울시립 자제원에 들어간 나혜석은 얼마후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했다.

나혜석 생가터
나혜석 생가터

나혜석이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99년 '제1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이 열린 이후 수원에 나혜석 거리가 조성됐고, 여성가족부는 우리나라 근대 여성 15인 중의 한 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사 남매 아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태어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나혜석은 자녀들에게 유언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혜석은 예술가라기보다는 그저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신여성이었다. 그의 예술보다는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관심사였다. 윤리, 도덕이라는 잣대로 그를 비난했다. 나혜석이 작품만으로 평가받을 수는 없었을까. 그의 그림은 합당한 가치를 인정받았을까. 남성이었으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당시 팽배해있던 신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감은 사회질서가 변하는 데 따른 남성들의 위기감과 불안감을 반영한다. 이는 신여성의 등장을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가 사망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성들은 편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적 대우를 받기도 한다. 여성혐오 논란은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 곳곳에 여성혐오 문화가 침투해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상에서 여성혐오 콘텐츠를 흔히 접한다.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적 편견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한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12/07 07:3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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