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고무대 '점프' 발레리나 서희
"혼과 열정이 담긴 발레하고파"(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꿈의 무대'에 서고도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의미를 잘 느끼지 못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아, 그 무대 참 큰 거였구나' 싶죠."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군무 무용수(코르 드 발레) 서희(23)는 지난달 세계 최고의 무대로 꼽히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을 맡아 높이 도약했다.
그는 발레에 적합한 체형, 빼어난 테크닉, 안정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줄리엣 역을 훌륭히 해 내며 뉴욕의 발레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다.
ABT는 파리오페라발레단, 영국 로열발레단과 더불어 세계 3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단체로 한국 무용수가 ABT의 전막 주역을 맡기는 사상 처음이다.
서희의 줄리엣 데뷔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는 강수진을 뛰어넘는 성과로 평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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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단의 휴가 시즌을 맞아 지난달 하순 귀국해 서울의 집에 머무는 그를 최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모처럼 꿀맛 같은 휴가를 즐긴다는 그는 "지난 2개월의 시즌은 매주 8차례씩 무대에 서며 총 12작품을 소화하는 강행군이었다"며 "매주 작품을 바꿔가며 거의 매일 무대에 서서 그런지 줄리엣으로 데뷔할 때도 의외로 덤덤했다"고 말했다.
서희는 "뉴욕에 워낙 발레팬이 많아서 그런지 줄리엣 역을 맡은 뒤로는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 생겼다"며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집으로 편지와 선물을 보내주시는 분도 있어 신기하다"고 덧붙였다.
◇"내 별명은 '코드 솔리 프린'" = ABT 무용수는 주역을 의미하는 프린시펄, 솔로 연기를 소화하는 솔로이스트, 군무 무용수를 뜻하는 코르 드 발레의 3개 등급으로 나뉜다.
ABT 스튜디오컴퍼니를 거쳐 2005년 ABT에 입단한 서희는 현재 가장 낮은 등급인 코르 드 발레다. 하지만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그에게는 솔로이스트, 프린시펄 역할도 종종 온다.
쇼팽의 음악으로 이끌어가는 '라 실피드',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안무한 신작발레 '온 더 니예퍼(Dnieper)'에서도 그는 주역이었다.
"좋아하는 무용수가 있으면 곳곳에 기용하는 게 ABT의 방침이에요. 다양한 작품에서 많은 역할을 맡김으로써 성장을 돕자는 것이지요."
보통 주역을 맡는 무용수는 한 작품을 끝내면 1주일을 쉬지만, 코르 드 발레인 그는 군무, 솔로이스트로서 끊임없이 무대에 서야 한다.
"덕분에 오버타임 수당이 ABT 안에서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어요. 체력이 회복할 틈도 없이 연속으로 무대에 서야해 몸은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무대에 설 기회가 많으니 행복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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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함이 가장 큰 무기= 서희는 발레리나로는 늦은 12살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다.
몸이 약한 그는 어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수영을 하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동네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잘한다, 예쁘다는 소리가 좋아 열심히 했어요.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 선화예중 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콩쿠르에 입상했으니 타고난 재능도 있었겠고요. 시작은 늦었지만 발레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사랑에 빠진 것 같네요."
선화예중 재학 중 미국 키로프발레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난 그는 2003년 로잔콩쿠르 입상한 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산하 존 크랑코 발레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죠. 그만둔다고 울고불고 한 적도 많아요. 난리를 친 다음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머리를 틀어올리고, 옷을 갈아입고, 발레하러 갈 채비를 했으니 본심은 발레를 정말 사랑했던 거죠."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 자신이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비결은 담대함인 것 같다고 말한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저 자신을 믿은 거죠."
그는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줄리엣으로 섰을 때도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들은 ABT의 근거지인 메트로폴리탄, 로열발레단이 서는 코벤트가든 등에 오르면 꿈의 무대에 섰다는 감동에 떨리다고들 하는데, 저는 담담했어요. 저에게는 한국의 시민회관에 서는 거나, 메트로폴리탄 무대나 별로 다르지 않던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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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魂) 담긴 춤을 추는 강수진 존경 = 10대 중반을 슈투트가르트에서 보낸 서희에게 강수진은 우상이었다. 강수진이 주역을 맡은 '오네긴'이 공연될 때마다 늘 공연장에 가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많은 발레리나가 하는 '오네긴'을 봤지만 강수진 선배처럼 깊은 감정을 표현해 내는 무용수는 없어요. 깊이를 알 수 없는 혼과 열정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더군요."
그는 자신의 우상을 처음 만났던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발레 유학을 할 때 거리에서 우연히 선배님을 처음 만난 거예요. 너무 긴장하고, 당황해서 들고 있던 초콜릿을 불쑥 내밀며 저도 모르게 '좀 드실래요?'라고 말해 버렸어요. 그러자 선배님이 '(무용수에게 좋지 않으니) 너무 많이 먹지 마라'고 웃으며 대답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도 초콜릿은 많이 먹어요. 호호."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도 현역에서 뛰는 강수진을 존경한다는 그는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완벽하게 자기 관리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쉽지는 않겠지만 선배처럼 오랫동안 최고의 무대에 남아있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무대에 빨리 서고파"= 서희는 12년만에 성사된 ABT의 작년 내한공연 때 부상으로 토슈즈를 신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다.
"'돈키호테'의 솔리스트로 무대에 설 예정이었는데 허리를 다쳐 공연을 못했어요. 한국 관객에게 제 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웠죠."
"ABT 내에 저를 포함해 남녀 무용수 5쌍으로 구성된 작은 모임이 있어요. 스페인 출신의 스타 발레리노 앙헬 코레야가 이끌어 저희끼리는 재미삼아 '스타군단'이라고 불러요. 발레단이 쉬는 기간에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 발레 공연에 대한 후원이 활발한 곳을 돌며 공연을 펼치는데, 한국 무대에도 곧 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ykhyun14@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08/09 09: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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