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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백범이 단죄하고 싶어한 아들 안준생
1939년 이토 아들과의 '화해극'에 동원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45년 8월15일 "왜적이 항복한 뒤에 우리도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임시정부 수뇌진 중 백범 김구 일행은 그해 "11월5일 선발로 중경을 출발하여 5시간의 비행 끝에 (그날 오후) 6시에 상해에 착륙했다."
이때의 감회를 백범은 "13년 전에 떠났던 상해의 공기를 비로소 다시 호흡하게 되었다"고 읊었다.

   13년 전 상해를 떠날 때에 비해 이곳에 사는 우리 동포는 몇십 배가 늘어난 사실을 지적하면서 백범은 화제를 바꾼다.
"그러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생활난이 더욱 심해진 까닭에 각종 공장이나 사업 방면에서 부정한 업자들이 속출했다. 그런 가운데 이전의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우혁ㆍ장덕로ㆍ서병호ㆍ한진교ㆍ조봉길ㆍ이용환ㆍ하상린ㆍ한백원ㆍ원우관 등 불과 10여 명뿐이었다. 그들의 굳건한 지조를 가상히 여겨 서병호의 집에서 만찬회를 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는 그만큼 일본 수중에 떨어진 상해에서 '민족지조'를 지키며 살아간 조선 동포는 드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친일부역배 중에서도 백범은 유독 한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에 보이는 구절이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배경식 역주, 백범일지 619쪽, 너머북스, 2008)
안준생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백범은 이토록 분노했을까?
1939년 10월7일, 상해 거주 조선인 14명으로 구성된 '만선시찰단'이 경성에 도착한다. 친일단체 상해 주재 조선인회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 일행은 경성 도착과 함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면담하기도 한다.

   이들의 고국 방문 소식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보도됐다.

   이들 신문보도를 비교하면 기사 비중에 확연한 차이가 난다.

   동아일보 39년 10월10일자는 '상해조선인 실업가 작일(昨日.어제) 환영회 성황'이라는 1단짜리 기사에서 간단히 이갑녕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이 고국을 찾아 환영회가 개최된 사실만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10월2일자에서 '상해 재류(在留) 동포 향토 방문시찰단 내(來) 7일 오후에 입경'이라는 2단짜리 예고기사를 수록한 데 이어 10월7일자 석간에서는 '30년만에 보는 고토(古土), 물심간(物心間)에 신개벽'이라는 3단 기사를 통해 이들의 방문 사실과 활동, 그리고 방문자 명단을 첨부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 방문자 명단에서 '안준생'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안준생은 10월15일, 박문사(博文寺)에 나타난다. 서울 장충단공원,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을 찾은 것이다. 정식 명칭이 보리사인 이 사찰이 박문사라고도 한 까닭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찰에 다름 아닌 안중근의 둘째아들 준생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준생은 박문사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친일신문 경성일보 10월16일자에는 '망부(亡父)의 속죄는 보국(報國)의 정성으로'라는 제목 아래 '이등공(伊藤公)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준생(중근의 유자<遺子>)군'이라는 부제 아래 준생이 전날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추선(追善) 법요를 거행했다는 행적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준생은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다음날인 10월16일, 준생은 조선호텔에서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난다. 당시 일본광업공사 사장인 분키치는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이다.

   이 둘의 만남을 담은 '역사적인 사진'은 매일신보 10월18일자에 '극적인 대면ㆍ여형약제(如兄若弟.형 같고 동생 같고),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영원히 풀다)'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아래 수록된 기사에 첨부돼 있다.

   이들의 만남을 담은 사진을 일본인 근현대사가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이토 후손인 이토 히로아키(伊藤博昭)에게서 찾아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간된 근간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한국에서는 도서출판 선인 출판)에 소개했다.(398쪽)
미즈노 교수는 안준생에 대해 "자세한 경력은 알 수 없다"면서 중일전쟁 이전에는 독립운동에도 관계하고 있었던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즈노 교수는 안준생이 1950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그다음 해에 죽었다는 다른 사람의 연구성과를 인용했다.

   안준생의 행적, 그중에서도 1939년 고국 방문 직전까지 활동 상황과 고국 방문 때의 더욱 자세한 행적은 쇼와(昭和) 14년(1939) 10월17일 조선동촉부에서 작성한 '재(在) 상해 조선인 만선시찰단 선내(鮮內.조선 내부) 시찰 정황'이라는 일본 외무성 경찰사 자료로 남아있다.

   연합뉴스가 최근 발굴한 이 자료에 의하면 고국 방문 당시 안준생은 33세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상해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안중근이 국외로 탈출할 때 어머니 태내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백범이 해방을 맞아 귀국할 때 많은 친일부역배 중에서도 유독 안준생을 거론하며 그를 단죄하려 한 까닭은 바로 이런 행적에서 비롯된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백범은 동학에 참여해 황해도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는 안중근 집안에 기거하며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안중근 집안과는 그런 인연이 있고, 더구나 안중근의 의거를 누구보다 높이 산 백범이지만, 아무리 그의 아들이라고 해도 노골적인 친일행적을 보이는 안준생을 용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총독부나 일본으로서도 안준생은 다름 아닌 안중근의 아들이기에 내선일치에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안준생을 '이용'하고자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어쩌면 안중근의 혈육으로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안준생의 친일 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중근이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 아들(오른쪽 앞)을 만난 안준생(왼쪽 첫번째)>>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10/21 07: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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