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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다"
051997- B296 중공 민항기 납치
(서울=연합뉴스) 피랍됐던 B296 중공 민항기가 유연보 중공 민항 부국장 등 승무원들을 태우고 중국으로 향하며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 1983.5.15 (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공로명 前외교 회고..중공, 초긴장속 '전광석화' 대처
6.25전쟁 이후 양국 첫 國號 사용..한중수교 시작 신호탄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정묘정 기자 = 1983년 5월5일, 어린이날 오후의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6.25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중공(中共) 국적의 항공기 한 대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날아들어온 순간이었다. 사실상의 '적기(敵機)' 출현에 따라 발령된 공습 경계경보로 전국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문제의 항공기는 우리 공군이 요격 태세를 갖추자 날개를 아래위로 흔들어 귀순 의사를 밝혔고, 강원도 춘천의 미군기지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승객 96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중국 선양(沈陽)에서 상하이(上海)로 향하던 중 공중 납치된 민항기였다. 영국 제트기 트라이덴트(Trident) 기종인 이 민항기는 춘천비행장 활주로를 50여m나 지났고 육중한 두 바퀴가 땅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첨예했던 동서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6.25전쟁 이후 북한과 혈맹(血盟)을 맺고 있던 중공 국적 항공기가 대한민국 땅에 착륙했다는 사실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단순히 적성국의 비행기 한 대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물리적 의미를 넘어서는 '외교의 불시착'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불시착은 이후 '중국'이라는 존재 자체를 우리 사회의 안방에 들어오게 만든 '역사의 초청장'으로 탈바꿈된다.

   중공 민항기 불시착 소식이 날아든 청와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오후 5시께 관계부처 대책회의가 긴급 소집됐지만 주요 각료와 실무자들은 사상 초유의 사태를 접하고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 몰라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때 장세동 경호실장이 방금 수신된 외신 전문(속칭 '티까')을 들고 다급하게 회의실로 뛰어들어왔다. 중국 민항국장 명의로 '교섭 대표단을 태운 특별기를 보낼 테니 착륙 허가를 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전문을 보낸 것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와 수교관계가 없던 중국이 사건 발생 몇시간 만에 이토록 신속하게 교섭 움직임에 나선 것은 불가사의하다는 게 당시 외교가의 평가였다.

   뾰족한 대응방안을 찾지 못하던 정부는 일단 중국의 요청을 승인했다. 이틀 후인 5월7일, 베이징을 출발한 33명의 대규모 교섭 대표단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대표단원들의 신분은 표면적으로 '민항국 직원'으로 돼 있었으나 실제로는 중국 외교부와 정보기관의 부국장급 인사가 대거 포함돼 있었다.

010604- 피납 중공 민항 여객기 처리를 위한 한-중 회담
(서울=연합뉴스) 신라호텔 에서 열린 중공 민항 여객기 처리를 위한 한-중 회담에서 공노명 외무부 차관보와 쉔투 중국민항총국장이 악수하고 있다.1983.5.7 (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8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양국간 교섭의 핵심은 자연스레 6명의 납치범에 대한 처리 쪽에 모아졌다. 이들 납치범은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해외 도피 과정에서 항공기를 납치했다. 이에 따라 중국 측은 승객과 여객기 기체는 물론 납치범까지 모두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리 정부는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국제 관례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3일에 걸친 마라톤협상 끝에 교섭은 납치범들의 즉각 망명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 국내법을 적용해 처벌하는 쪽으로 타결됐다. 납치범들은 우리 법정에서 재판을 거쳐 징역형이 확정됐지만 1년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대만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번 교섭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외교적 의미가 큰 쟁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양국의 교섭 합의문서에 국호(國號)를 공식 사용하느냐의 여부였다. 외교관계가 없는 양국이 상호 정부를 어떻게 칭하느냐는 그 자체로 외교적 함의를 내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호의 공식 사용 여부를 놓고 양국의 속내는 확연히 달랐다. 사실 중국은 국호의 공식 사용을 내켜하지 않았다. 동서 냉전시대라는 국제정치 환경도 있었지만 북한과의 혈맹관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던 탓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로 만들어 '북방외교'의 일정한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전략적 의도를 속에 품고 있었다. 정부의 이 같은 기류는 한달여 뒤인 6월29일 이범석 당시 외무부장관이 국방대학원 특강에서 "우리 외교의 과제는 소련,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방정책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한데서 읽혀지고 있다.

   우리측 교섭대표단은 "남의 안방에 들어와서 안방 주인에게 인사도 안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논리를 내세우며 합의문서에 양국의 공식 명칭을 집어넣도록 압박했고 결국 중국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합의문서에는 이후 외교부 장관을 지낸 공로명 당시 '대한민국' 외무부 제1차관보와 센투(沈圖) '중화인민공화국' 민항총국 국장이 양국을 대표해 공식 서명했다. 1949년 중국 정권이 수립된 뒤 양국의 공식 국호를 사용한 외교적 교섭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이다.

동아시아재단 국제회의 공로명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6일 제주평화연구원에서 열린 '동북아 안보체제 모색 국제회의'에서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2010.8.6. khc@yna.co.kr

   결국 중국 여객기 피랍 사건이 북방외교의 출발점이자 9년 뒤 이뤄진 한ㆍ중 수교의 주춧돌이 됐다.

   전국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이번 사건은 이처럼 불과 5일만에 '전광석화'처럼 수습됐다. 그러나 사건 대응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다급하다'는 느낌을 줄 만큼 이례적으로 발빠른 대응을 보여준 배경을 놓고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1961년 민항국 소속의 조종사 2명이 귀순한 이래 항공기나 선박 납치 사건이 5차례나 있었지만 중국은 단 한 번도 문제 해결을 서두르거나 교섭대표를 파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수께끼의 답은 탑승객 안에 있었다. 당시 납치됐던 여객기에는 중국의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 학자가 탑승해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로서는 이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납치되자 미수교국인 한국에 대규모 교섭대표단까지 급파해가며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중국인 승객과 교섭대표단이 한국에 체류한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우리 정부가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선전할 수 있는 '황금같은 시간'이었다. 당시 민항기는 춘천 미군기지 비행장의 활주로가 짧은 탓에 이를 지나쳐 불시착했다. 정부는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중국 측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정부는 비행기 수리를 명목으로 시간을 계속 끌면서 '한국 알리기'에 나섰다. 특급 호텔에 숙소를 마련하고 기업체와 주요 산업현장을 둘러보게 했고, 개별적으로 라디오와 내복 같은 선물을 잔뜩 안겨주며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한중관계의 흐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거에 뒤바뀌었다. 이듬해인 1984년부터 대중국 수출이 급증한 것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983년 대(對)중국 수출 금액은 484만 달러였지만 1984년에는 1천694만3천 달러로 무려 250%나 늘어났다. 그 뒤로도 대중 수출은 꾸준히 증가해 1990년에는 수출액이 5억8천485만4천 달러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로서 교섭대표단을 이끌었던 공로명 전 장관의 술회는 적지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공 전장관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중국에 대해 적의가 없고 실질적인 관계를 갖길 원한다는 진의가 전달됐다"고 평가했다. 이제는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진정성이 전달된 것이 가장 강력한 외교의 무기가 됐다는 뜻이다.

R18270-중공여객기 납치사건
(서울=연합뉴스) 중국인 무장 승객에 의해 납치, 중부전선 기지에 불시착했던 중공여객기 승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민항기에 탑승하고 있다. 1983.5.10 (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미수교 상태의 양국에 최대의 '악재'가 될 뻔한 이 사건은 내년이면 20주년을 맞는 양국 수교의 초석이 된 최고의 '호재'로 역사에 기억될 전망이다.

   ◇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 = 우리 외교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현장에서 두루 경험한 '역사의 산 증인'이다.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새로운 일이 주어져도 밤을 새워가며 연구해 곧바로 본질을 파악해내는 능력과 성실함을 갖췄다는 평가다.

   1958년 외무부에 입부한 이후 동북아 과장과 아주국 심의관, 아주국장, 주(駐)일본 대사 등을 거친 대표적인 아시아통이다. 주호주 참사관과 주카이로 총영사, 뉴욕 총영사, 주러시아 대사를 역임하는 등 세계 각 지역의 외교에도 두루 밝은 정통외교관이다.

   특히 1983년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 당시 우리 측 수석대표로 교섭을 깔끔하게 마무리했고, 1990년에는 초대 주모스크바 영사처장으로 현지에서 한ㆍ소 수교를 진두지휘하는 등 북방외교의 선두주자로 활약했다.

   1994~1996년 제25대 외무부 장관을 지내고 퇴임한 뒤에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과 한일포럼 회장, 동서대 석좌교수, 세종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함북 명천(78) ▲서울대 법학과 ▲英 런던대 정경대 ▲동북아 과장 ▲아주국 심의관 ▲아주 국장 ▲정무 차관보 ▲뉴욕 총영사 ▲주러시아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 ▲주일본 대사 ▲외교부 장관 ▲동서대 석좌교수 ▲세종재단 이사장
rhd@yna.co.kr
myo@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7/04 08: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