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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GMO는 미국 음모"…러시아,'애국 사이비과학'에 멍든다

푸틴 민족주의와 결합…"GMO는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인종학살용 생물무기" 등 음모론 유행
"러시아판 실리콘밸리에 집중투자…정부 간섭·통제가 투자효율 떨어뜨려"

(서을= 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러시아 의회는 지난 7월 러시아과학원의 거듭된 반대에도 유전자변형식품(GMO)의 생산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입법의 주요 논거엔, GMO가 러시아인들의 불임 위험을 높여 인구를 줄이려는 서방의 음모의 하나라는 '과학적' 주장도 있었다.

러시아판 실리콘밸리인 아카뎀고로도크 가는 길 [출처: novosibirskguide.com]
러시아판 실리콘밸리인 아카뎀고로도크 가는 길 [출처: novosibirskguide.com]러시아 제3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시베리아 침엽수림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실리콘 포리스트'란 별칭을 얻었다.

러시아에서 매년 10~15%의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는 에이즈의 예방을 위해선 콘돔 사용이 효과적임에도 콘돔은 러시아를 약하게 만들려는 미국의 수단이라는 음모론이 러시아 내에 널리 퍼져 있다.

성교육 미흡과 정맥 마약 주사 등이 에이즈 확산의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지만, 러시아 관변 학자들은 "서방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에이즈에 접근하고 있다"며 오로지 이성간 성관계만이 "확실한 예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지난 6월 영국의 인디펜던트가 보도했다.

포린 폴리시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러시아에선 "교육받은 사람들도 파충류가 세계정부를 접수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식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러시아 과학자의 한숨 섞인 소리를 전했다.

사이비 과학이 정통 과학을 몰아내고, 사이비 과학자들이 크렘린 궁의 정치적 위세를 등에 업고 정통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방해하는 현상이 근년에 두드러지고 있다. 사이비 과학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 고조되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 반서방 고립주의와 결합해 기괴한 힘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1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과학 강국인 러시아의 정통 과학계가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월 한 과학분야 시상식에서 러시아의 최고 과학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대중들에게 무지의 빛을 가져다주는 데" 가장 공로가 큰 수상자로 이리나 예르마코바를 선정했다. TV 방송 출연, 국회 증언 등을 통해 GMO는 러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학살용 생물무기라는 '과학 이론'을 주창하고 있는 생물학자이다.

이 익살스러운 시상식을 조직한 과학 전문기자 알렉산데르 소콜로프는 "러시아에 과학이 살아 있고 러시아 과학이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만방에 고한다"고 선언했지만, 포린 폴리시에 따르면 회의적이다.

크렘린 궁이 적극적으로 포섭해 정치적 권력을 안겨주고 연구자금을 몰아주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핵에너지를 연구하는 쿠르차토프연구소 소장인 물리학자 미하일 코발추크다.

푸틴 대통령의 고위 과학 자문관중 한 사람인 그는 세계정부를 장악한 글로벌엘리트가 미국의 감독하에 인간과 유전적으로 다른 하위인종을 개발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러시아 상원에 제출함으로써 푸틴의 러시아 민족주의, 반서방 노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인물이다.

노역을 전담하는 이 "노예 사람"은 거의 먹지도 사고하지도 않고 생식도 명령이 있을 때만 한다. 그가 이런 기괴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엔 자신의 연구소가 사용할 연구자금을 더 받아내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다.

코발추크의 형제인 유리 코발추크는 러시아 고위관계자들의 '사금고'로 불린다. 이런 연줄 때문에 코발추크는 러시아 과학계의 최고 수장인 과학원장의 유력 후보로 꼽혔었으나 지난 2008년 과학원은 그를 수장으로 선출하기는커녕 정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거부했다.

과학원이 이후에도 계속 그를 거부한 게 2013년 러시아 정부에 의한 과학원 해체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 정부는 과학원 자산 대부분을 몰수한 뒤 과학원보다 덜 엄밀한 농업 및 의학원과 통합시키고는 과학 관련 국가기관을 신설, 그 산하에 둠으로써 과학원의 독립성을 빼앗았다.

18세기에 창설돼 무려 300년에 걸쳐 러시아 과학 분야 연구소들의 신경망 중추 역할을 해온 과학원의 과학자들은 이제 비과학자들의 통제를 받으며 문서 작성에 매몰돼 있는 반면 코발추크의 연구소는 점점 위세를 떨치면서 과학원 산하 여러 연구소를 관장하게 됐다.

지난 8월 푸틴의 비서실장에 전격 기용된 미지의 인물, 안톤 바이노는 2012년 발표한 학술논문을 통해 우주를 스캔해서 사회와 경제 동향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장치인 '누스코프(nooscope)'를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noo'는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마음 또는 정신을 뜻하니, 현미경이나 망원경처럼 인간사회 전체를 보는 '심경(心鏡)'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국의 BBC 방송은 바이노의 등장 당시 기사에서 바이노는 사회를 조직하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며 복잡한 도표와 도형들로 이뤄진 누스코프라는 시공(時空)의 관계도를 그려냈지만, 러시아인들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고 전했다.

바이노는 경제와 사회는 전통적인 수단들로는 관리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에, 정부가 새로운 규제와 통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누스코프가 전 지구적 의식을 활용해 "생물권과 인간활동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탐지하고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누스코프 개념은 결국 1990년대 초반 러시아의 혼돈기를 겪고 난 후 등장한 푸틴이 질서와 통제를 앞세워 지난 10여 년간 러시아를 통치해온 개념인 '관리된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것이라고 BBC는 지적했다. 사회는 푸틴 같은 최고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활용될 수 있다. 물론 누스코프의 실물이 공개된 적은 없다.

"크렘린 궁은 이들 사이비 과학이 자신들의 이념적 필요에 안성맞춤임을 알아챘다"고 포린 폴리시는 지적했다.

근래에 러시아 민족주의와 사이비 과학 간 결합이 강화되면서 사이비 과학자들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과학자들을 "비애국적인 러시아혐오 분자"로 매도하고 축출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유전자계보학을 개척했다고 주장하는 생화학자 아나톨레 클리오소프는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서방의 "정치적 올바름"의 표현일 뿐 실제로는 러시아 북부에서 인류가 기원했다면서 자신의 학문을 "애국 과학"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크렘린 궁은 사이비 과학을 지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정통 과학자들을 사회로부터 떼어놓으려 하고 있다. 지난해 일부 대학에선 과학 논문 발표 전에 대학 행정당국의 심사를 받게 하는 소련 공산주의 시절의 규정을 부활했고, 다른 일부 대학에선 교수들의 인터뷰에 대해서도 사전 허가제를 도입했다.

"어느 나라에나 사이비 과학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는 암성 세포와 같은 것이어서 건강한 유기체는 암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물리칠 수 있는 반면 병든 유기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유전학자인 스베틀라나 보린스카야는 포린 폴리시에 말했다.

러시아에선 자연과학뿐 아니라 경제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가짜 학위논문이 만연하고 있으며, 그 저자들 중 많은 수가 의회에 진출하려는 사람들이다. 크렘린 궁이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TV에 출연시키는 방식 등으로 활용하는 가짜 전문가들도 있다.

이반 안드리예프스키는 지난 2014년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미사일 공격에 추락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사건과 관련, 국영 TV에 출연해 이 여객기가 러시아 측이 아닌 우크라이나 공군기에 격추됐다는 증거라며 조잡하게 조작된 인공위성 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경제학 박사 학위논문 가운데 러시아 국방산업에 관한 내용 26페이지 중 17페이지를 다른 사람의 논문에서 통째로 옮겨쓴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러시아가 사이비 과학만 우대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제3의 도시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걸리는 곳에 60년 전 세워진 러시아 과학기술의 본산 아카뎀고로도크가 러시아 당국의 집중투자로 부활하고 있다.

생물공학에서부터 핵융합에 이르기까지 각종 실험연구소가 밀집한 이곳이 러시아판 실리콘밸리, 즉 과학기술분야 신생기업들의 천국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게 러시아 정부의 생각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지난달 30일 이곳을 비롯해 러시아의 첨단 과학기술 산업 분야에 대한 현지 방문 보도를 전하면서 "젊은 과학기술자들은 재주 있고 열성적이지만, 정부가 간섭하나 통제하는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석유와 광물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가 유가와 광물 가격의 급변에도 지탱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절박한 염원의 러시아와 과학기술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유를 주지 않는 러시아가 공존하고 있다"고 이 매체는 진단했다.

ydy@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2/02 16:2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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