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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중국인, 신분상승과 생계유지 위해 입대"

'중국군의 참전과 동원 유형 및 구성에 관한 연구' 논문

1950년 10월 평안북도 구장군에서 붙잡힌 중국군(가운데).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중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4달 정도 지난 1950년 10월 18일 참전을 결정했다. 다음날 동북변방군 제13병단 산하 제40군단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당시 중국 정부가 내세운 참전 명분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고, 가족과 나라를 보호한다'는 뜻의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지원해 자본주의의 침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참전 과정에서 사상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군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개인적 영달과 생계유지가 참전의 원인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중국인 첸줘(陳卓) 씨는 이 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정신문화연구'에 실린 논문 '한국전쟁 시기 '중국군'의 참전과 동원 유형 및 구성에 관한 연구'에서 중국군 군인들의 참전 동기에는 상당히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고 밝혔다.

경기도 파주 적성면 중국군 유해 임시안치소에 안치된 한국전쟁 참전 중국군 유해. [국방부 제공]

먼저 첸 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 정부가 참전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지 1년이 안 돼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면서 북한이 수세에 몰리자 중국 지도부는 참전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전부터 진행 중이던 반혁명분자 진압운동, 토지개혁운동을 강화하는 데 한국전쟁을 활용한다.

첸 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을 중국군 내부에서 동원된 자, 정규군에 편성된 민간 무장조직 출신 사람, 지방정부가 징병한 자 등으로 구분한다.

그는 당시 중국군의 70%가 공산당이 1949년까지 싸워왔던 국민당 출신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공을 세워 진급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주장한다. 참전이 기회였던 것은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민간 무장조직 출신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지방정부가 징병한 사람 가운데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으려는 이들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1952년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겨우 54달러에 불과했는데, 그해 일반 병사에게 지급된 연간 보조금이 116.9달러였다"면서 "당시 대부분의 중국군은 본인이 받은 보조금에 만족했다"고 말한다.

물론 중국군 중에는 부농이나 지주 출신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첸 씨는 군대에 가지 않으면 반혁명분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입대신청서를 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참전한 학생들도 개인의 가치와 계급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덧붙인다.

첸 씨는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은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다르고 공산당에 대한 인식도 다양했다"면서 "이 군대를 '중공군'이나 '중국인민지원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고, '중국군'이라는 호칭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2/12 13:34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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