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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세월 더께 묻어나는 성주 한개마을

(성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한 한개마을(중요민속자료 제255호)은 예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 중 하나로 손꼽혔다. 마을 입지의 생김새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크고 작은 고택들이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前低後高)로 배치돼 있다.

민속마을 원형이 잘 보존된 한개마을에는 옛 선비들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택이 여럿 있다. [사진/전수영 기자]

소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영취산(靈鷲山·332m)의 줄기가 마을을 보듬어 안은 좌청룡·우백호의 지세를 갖췄다.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백천(白川)과 서쪽에서 흘러드는 이천(伊川)은 마을 어귀에서 합수해 동남쪽으로 흘러간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 백천에 있었던 한개나루에서 유래했는데 '한'은 크다,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로 '큰 나루터'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명당지세에 따른 발복 때문인지 이 마을에서는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조선 시대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가 배출됐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 호위 무관으로 평생 절의를 지킨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1713∼1773), 조선 말기 한성판윤과 공조판서를 역임하며 당대의 최고 선비로 이름을 드높였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성리학의 이론가로서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가 대표적이다.

유서 깊은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 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해 개척한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집성마을이다. 6채의 재실을 포함한 75채의 집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졌는데 오랜 세월에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마을 곳곳에는 퇴락한 가옥을 복원하고 정비해 옛 모습을 살리려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곽차순 문화관광해설사는 "전저후고의 모양을 하고 있어 어느 집에서나 햇빛이 잘 들고 집집마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가 대지 특성에 따라 짜임새 있게 배치돼 있다"면서 "어느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도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는 정겨운 농촌 마을이지만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는 안채에 들어가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진사댁의 새사랑채

◇ 역사가 숨 쉬는 옛 건물의 아름다움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서 마을 길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가면 제일 먼저 진사댁(도 민속문화재 제124호)이 나온다. 정조 22년(1798)에 지은 집으로 안채는 기와집, 사랑채와 새사랑채는 초가다. 눈여겨볼 것은 새사랑채로 건물의 구조가 조금은 독특하다. 여성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 사이에 배치한 것도 특이하지만 마루와 방, 창고가 각각 1칸씩 총 3칸으로 'ㄱ' 자 형태로 지어진 것이 눈길을 끈다. 누마루는 계자난간으로, 문살은 '卍'자 장식으로 한껏 멋을 냈다. 방의 한 벽면에 크고 작은 수납장을 세 개나 만든 것도 이색적이다.

민박이 가능한 진사댁을 나와 삼거리에서 왼쪽 마을 길로 접어들면 대문 앞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있는 교리댁(도 민속문화재 제43호)을 만난다.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데, 노거수가 고택의 품격을 달리 보이게 한다.

조상 중 한 분이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하여 '교리댁'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영조 36년(1760)에 지어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넓은 대지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를 비롯해 대문채·중문채·서재·사당이 서로 떨어져 배치돼 있다. 사랑채 뒤편은 후원으로 가꾸어져 있는데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사당은 일반 사당과는 달리 툇마루가 나 있고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느낌이 든다.

고택보다는 쓰러질 듯 지주에 의지한 채 서 있는 '탱자나무 같은 귤나무'가 인상적이다. 응와 이원조가 제주 목사로 재임할 때 선정을 베풀어 감사의 뜻으로 받은 감귤나무 세 그루를 아들 셋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는 탱자나무처럼 변했다고 한다. 마당에는 말을 탈 때 딛는 디딤돌인 상마석(上馬石)이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상마석에는 '雲西迎月'(운서영월), 즉 '구름은 서쪽으로 흘러 달을 맞이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북비(北扉)' 현판을 걸어놓은 사립문과 북비채

◇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 깃든 북비고택

교리댁 바로 위쪽에는 마을에서 이야깃거리가 가장 많은 응와종택(도 민속문화재 제44호·대감댁)이 자리 잡고 있다. 온갖 풍랑을 이겨낸 회화나무와 솟을대문이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좌우 행랑보다 높게 설치한 솟을대문에 개판(문턱)이 없는데 이는 집주인인 이원조 대감이 수레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凝窩世家'(응와세가)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北扉'(북비)라는 현판이 걸린 사립문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사랑채가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돼 있다. 보통남쪽이나 동쪽을 향해 문을 내는데 사립문이 북쪽으로 난 것이 특징이다. 이 북비고택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이 깃들어 있다.

이원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직언해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 50대를 맞고 파직됐다. 이석문은 관직에 썼던 모든 도구를 버리고 낙향해 평생을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남쪽으로 나 있던 문을 뜯어서 북쪽으로 옮기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북비고택'으로 불린다.

월곡댁 안채와 별당채 사이 돌담길

꼿꼿한 선비 정신을 곱씹으며 대문을 나서면 바로 위편 구릉에 월곡댁(도 민속문화재 제46호)이 버티고 있다. 집 안에 길이 있을 정도로 대지가 넓고 규모도 크다. 지형의 기울기를 반영한 멋진 기단 위에 세워진 사랑채, 안채와 별당채를 둘러싼 토석담이 눈길을 잡아둔다. 사랑채에 오르면 백천이 마을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 안채를 드나들 수 있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고 중문채 앞의 작은 협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다.

마을 안쪽 산기슭에 있는 한주종택의 한주정사

월곡댁에서 왼쪽 담장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고택의 기와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신라 애증왕 3년(802) 체징이 창건한 감응사(感應寺)로 오르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꺾으면 마을의 가장 안쪽인 동쪽 산기슭에 한주종택(도 민속문화재 제45호)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영조 43년(1767)에 건축한 한주종택은 고종 3년(1866) 한주 이진상이 새로 고쳐 지은 가옥으로, 안채·사랑채가 있는 구역과 정자가 있는 구역으로 나뉜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진상은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을 중심사상으로 이일원론(理一元論)을 주장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학풍을 이끌던 '주문팔현'이 주축이 되어 한주학파를 형성했다. 두 군데의 돌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사랑채에는 '主理世家'(주리세가) 현판이 걸려 있다. 이진상의 아들인 한계 이승희, 손자인 삼주 이기원, 백계 이기인 등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유공자다.

한주종택의 별채인 한주정사(寒州精舍)는 높은 석축 위에 세워져 내려다보는 주변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주희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사숙하는 곳이라는 뜻의 '祖雲憲陶齋'(조운헌도제) 현판이 걸린 정사는 두 칸 대청을 두고 서쪽에 한 칸 방과 동쪽에 두 칸 방을 낸 뒤 동쪽 방에 잇대어 남쪽으로 한 칸의 누마루가 내어져 있다. 정사의 여러 현판은 예스러운 정취를 풍긴다. 고풍스러운 소나무와 상·하지 구조의 쌍지(雙池)는 한국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회댁의 고방채

1950∼60년대 은막스타 최은희와 김진규 주연의 영화 '성춘향' 촬영지였던 한주정사를 나와 진사댁으로 가는 내리막길은 마을의 또 다른 멋이다. 흙과 자연석을 번갈아 얹어 벽을 세운 뒤 그 위로 기와를 얹은 토석담은 정겨운 고향길을 연상시킨다. 고택과 고택을 잇는 담장은 멋스럽기도 하다. 일부 구간은 너무나 잘 보수된 탓인지 오랜 세월의 무게가 배어 나오질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고샅길을 걷다 보면 극와고택(도 민속문화재 제177호)과 하회댁(도 민속문화재 제176호)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극와고택의 사랑채는 초가임에도 평면구성이 양반가옥과 같은 형태다. 자연석을 주춧돌 삼아 그 위 기둥을 올린 안채의 댓돌에는 마음만은 만석꾼이라는 의미인 '萬石'(만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랑채에서는 지조 있는 선비의 검약했던 생활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가옥의 이름은 국권상실 후에 소복 입고 거적 깔고 살면서 두문불출한 극와(極窩) 이주희의 아호에서 따온것이다. 사랑채와 정침(正寢)이 흙담으로 분할돼 남녀 공간 구분이 확실한 하회댁은 당시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고방채가 특히 아름답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왕자 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이다.

◇ 세종대왕자 태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민속촌이 아닌 사람 냄새 나는 한개마을에서 13㎞가량 떨어진 세종대왕자 태실(世宗大王子胎室·사적 444호)로 향했다. 낙엽과 송림이 우거진 운치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태봉(258m) 정상부에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元孫)으로 있을 때 만든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胎)무덤이 태비(胎碑)와 함께 두 줄로 정연하게 배치돼 있다.

태실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 사이에 걸쳐 조성됐다. 석물은 화강암을 사용했다. 태실 석물은 지하에 태항아리를 넣는 석함(石函)을 두고 그 위에 사각형의 기단석과 구형의 중동석을 얹고 맨 위에 보주형의 상륜을 가진 개첨석을 올린 구조다.

현재 태실 19기 가운데 14기는 조성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다섯 왕자(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태실은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돼 남아 있지 않다. 수양대군의 태실 앞쪽에는 왕자가 임금이 되면 태실을 다시 꾸미는 태봉(胎封)의 법식에 따라 거북 등에 비를 올린 가봉비(加封碑)가 세워져 있다.

태실의 구조 모형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 자녀가 태어나면 엄격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밀봉한 뒤 좋은 날과 장소를 정해 전국 각지의 길지에 묻고 태주의 무병장수와 복을 빌면서 왕권 안정과 번영을 함께 기원했다. 이러한 조선왕실의 풍습을 장태(藏胎) 또는 안태(安胎)라고 한다. 문종실록에는 '태장경에서 이르기를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서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영택 문화관광해설사는 "세종대왕자 태실은 전국에서 왕자의 태실이 모여 있는 유일한 곳"이라며 "세종은 태실 설치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와 고충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명의 태를 한 곳에 봉안했다"고 설명한다. 태실 조성은 많은 물자와 인력이 투입됐다. 그뿐만 아니라 태실이 들어서면 '태실도국'이라 하는 해당 지역에서 거주나 농경등의 활동을 금지했다고 하는데, 백성을 아끼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했다.

성주군은 일제 강점기에 일부 태항아리 등이 약탈되는 아픈 역사가 서린 세종대왕자 태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1/10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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