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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추사 김정희

재능과 노력이 길러낸 조선의 천재

경기도 과천 과지초당 마당에 있는 추사 김정희 동상 [사진/임귀주 기자]

(서울·과천·예산=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다. 추사(秋史), 완당(阮堂),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병거사(病居士) 등 사용한 호(號)만도 100개가 넘는다.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완성하고 북학(北學, 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는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금석학과 고증학에서도 대가를 이뤘다. 이런 눈부신 성과에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벼룻돌 10개를 구멍 내고, 붓 1천 자루를 부러뜨리는 노력이 있었다.

조선 정조 10년(1786년) 봄, 충청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도 가뭄이 극심했다. 마을과 집안의 우물은 말라 가고 푸르던 초목은 생기를 잃었다. 6월 3일이 되자 돌연 우물에 물이 차오르고 나무와 풀이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되살아났다. 이때 마을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 회임 후 어머니 뱃속에서 24개월이나 있다가 태어났다는 이상한 아이였다. 그가 바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의 장남인 김정희다.

용궁리 추사고택의 강희진 문화관광해설사는 "매년 봄 가뭄이 들고 6월에 장마가 시작되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날씨가 추사 탄생과 결합해 이런 이야기가 생겨난 것 같다"며 "웬만해선 마르지 않는 이곳 우물이 말랐다니 당시 가뭄이 무척 혹독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추사고택 왼쪽 담 바깥에는 추사가 태어날 당시 물이 말라 갔다는 우물이 보존돼 있다.

◇ "글씨 잘 쓰게 되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추사는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세상에 나왔다.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12촌 대고모이고,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사위다. 그가 속한 경주 김씨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남양 홍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히 당대 최고 명문가였다.

추사와 연관 깊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혼인해 월성위(月城尉)라는 부마의 작호를 받은 인물이다. 영조는 사위와 딸을 위해 경복궁 영추문 바로 맞은편(현재 서울 통의동)에 월성위궁을 하사했다. 현재 통의동 골목 안쪽의 월성위궁이 있던 자리에는 조그만 화단이 자리하고, 화단에는 정원수로 사용했다는 백송나무의 밑동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백송나무 중 가장 크고 아름다워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는 백송나무는 1990년 태풍에 쓰러졌다고 한다. 영조는 또 용궁리 일대를 사전(賜田)으로 내리고 충청도 53개 군현(郡縣)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걷어 집을 짓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건축된 것이 바로 추사고택이다.

추사 탄생 무렵 아버지 김노경은 월성위궁에 살았는데 당시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내를 예산으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추사가 어릴 적에 쓴 '입춘첩'(立春帖) 관련 이야기는 흥미롭다. 여섯 살 때 추사가 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씨를 월성위궁 대문에 붙였는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朴齊家)가 이를 보고 추사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추사는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았고, 결국 북학의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일곱 살 때는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입춘첩을 본 후 추사의 아버지를 찾아와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되리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채제공의 예언처럼 추사는 글씨로는 세상에 이름을 날렸지만 제주도와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두 번이나 하는 모진 운명을 맞는다.

7~8세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한 추사는 8살 무렵 대(代)를 이을 아들이 없던 백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가 집안의 종손으로 살아간다. 8살 때 생부와 동생들에게 보낸 문안편지를 보면 나이에 비해 글의 내용이 어른스럽고 사려 깊은 것을 엿볼 수 있다. 글씨체 또한 무척 단정하고 유려하다.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장마와 무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소자는 어른(백부)을 모시고 글공부하면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백부께서 막 행차하셨는데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위도 이와 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만 살펴주십시오. 계축년(1793) 6월 10일 아들 정희 올립니다."

하지만 추사의 10대는 평탄치 않았다. 10대 초반에 이미 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 16세에 친어머니를 잃었고, 20세 때는 부인 한산 이 씨와 사별한 데 이어 스승 박제가마저 떠나보낸다.

충남 예산 추사고택

◇ 어린 시절 보낸 정갈한 고택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용산(74.3m) 발치 비탈에 영당, 안채, 사랑채, 솟을대문 순으로 동서로 길게 자리한다. 앞으로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흉물처럼 방치됐던 고택을 1970년대 복원하면서 규모가 절반으로 줄었다지만 모습은 정갈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화단을 ㄱ 자로 두른 사랑채가 나타난다. 화단에는 추사가 해시계 받침대로 썼다는 육각 돌기둥이 서 있다. 기둥에는 '石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랑채에는 온돌방이 세 칸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다. 사랑채 마루 위 벽에는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복제본이 걸려 있다. 겨울날 소박한 집 한 채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림에는 추사가 1840년부터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다.

'세한'은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의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에서 따온 것이다. 제자의 의리를 추위에도 푸른 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이상적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최신 서적을 찾아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세한도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다.

사랑채 주련에는 '畵法有長江萬里'(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 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書執如孤松一枝'(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등의 추사 글씨가 담겨 있다. 방에는 병풍과 서책이 놓인 책상이 있고, 대청에는 추사의 글씨를 담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ㅁ 자 형 안채가 있고, 그 뒤로는 영당이 자리한다. 영당에는 추사의 제자이자 화가인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초상화(복제본)가 있다. 국가 중대사 때 입는 대례복 차림의 나이 든 추사가 인자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볼에는 어려서 앓은 것으로 추정되는 마마 자국까지 표현돼 있다.

김흥경의 묘소 앞에 있는 백송나무

◇ 애틋한 사연 깃든 합장묘

고택을 나와 오른쪽으로 우물을 지나면 이내 추사의 묘다. 봉분은 나지막하고 석물도 많지 않다. 추사는 15세에 동갑인 한산 이 씨와 혼인해 금실이 좋았으나 5년 만에 잃었다. 그리고 23세에 두 살 아래 예안 이 씨와 재혼한다. 1937년 후손들이 한산 이 씨 홀로 잠들어 있던 이곳 묘소에 과천에 묻혔던 추사와 예안 이 씨를 이장하면서 3인 합장묘가 되었다고 한다.

추사와 예안 이 씨와의 애틋한 이야기도 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때 아내에게 쓴 편지 40여 통이 전해진다. 추사가 제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반찬을 투정하는 편지를 보내면 부인은 정성스레 반찬을 마련하고 의복과 함께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안 이 씨는 유배 3년째인 1842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 달여 뒤 부음을 받은 추사는 눈물로 슬퍼하며 '애서문'(哀逝文)과 제문을 지었다. 특히 '悼亡詩'(도망시,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는 무척 슬프고 애틋하다.

"어떻게 월로께 호소를 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 밖에서 내가 죽고 그대는 살아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고택에서 왼쪽으로 가면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나타나고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이 부부는 1720년생 동갑내기로 13세에 혼인했는데 1958년 남편이 돌연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더니 결국 남편을 따라갔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는 조선 왕실이 배출한 유일한 열녀라며 정려문을 내렸다. 정려각 안쪽을 들여다보면 사당이 있던 자리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려각에서 백송공원을 지나 조금 더 이동하면 수피가 하얀 백송나무가 묘소를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멋진 풍경을 만난다. 이 백송나무(천연기념물 제106호)는 추사가 24세 때 청나라 연경에 다녀올 때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줄기가 3개였으나 2개가 말라 죽어 지금 하나만 남았다.

추사 묘소 인근에는 추사기념관이 있어 추사의 삶과 업적, 그가 남긴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다.

추사고택에서 남쪽으로 차로 10분 거리의 오석산(烏石山) 자락에는 삼국 시대 고찰인 화암사(華巖寺)가 있다. 김한신이 화순옹주와 혼인하자 영조가 내린 사전에 오석산이 포함됐고, 화암사는 추사 집안 조상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이 됐다.

화암사의 구조는 일반 사찰과 달리 조선 시대 민가의 한옥 같다. 안채와 사랑채가 합쳐진 것 같은 요사채가 전면에 서 있고 누마루가 돌출해 있다. 화암사에서 불교를 공부한 추사는 제주도 유배 시절인 1846년 편지를 보내 중건을 지시하고,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을 직접 쓰기도 했다. 무량수각과 시경루의 친필 편액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에서 만날 수 있다.

요사채 오른편으로 관광객용 길을 따라가면 대웅전 뒤로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오른쪽 바위의 중앙에는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란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사찰을 '천축의 옛 선생댁'이라 표현한 추사의 재치가 돋보인다.

왼쪽 바위에는 '詩境'(시경)이 음각돼 있다. 사찰 뒤편 등산로를 따라 200여m를 가면 높이 3~4m에 달하는 길쭉한 바위에 '小蓬萊'(소봉래)가 새겨져 있다. 추사는 유난히 바위가 많은 오석산을 작은 금강산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화암산 대웅전 뒤 병풍바위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

◇ 말년에 예술혼 불태운 과지초당

경기도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생부 김노경이 1824년 마련한 별서다. 1837년 김노경이 세상을 떠나자 추사는 인근 옥녀봉에 부친의 묘를 세우고 이곳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추사는 9년간의 제주 유배를 마치고 3년 후 다시 약 1년간 북청에서 귀양생활을 한다. 유배지인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는 1852년 8월부터 4년간 이곳에 머물며 말년을 보냈다.

1824년 당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이었던 김노경은 중국 학자에게 보낸 편지에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구축해서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 이름했습니다. 봄이나 가을 휴가가 날 때 적당한 날을 가려 찾아가 지내면 작은 가취(佳趣)를 느낄만해서 자못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합니다"라고 적었다.

과지초당 주변으로 푸른 오이밭이 펼쳐지고, 연못이 내려다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는 말년에 이곳에서 가족과 생활하며 책을 읽고 제자를 가르치고 친구들을 만나는 등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글씨만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썼다. 이때 쓴 글씨 중 유명한 것으로는 청나라 학자 옹방강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풀이한 글 속에 있는 한 구절인 '山崇海深'(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과 '遊天戱海'(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가 있다.

경기도 과천 과지초당 옆에 있는 추사박물관

과천시가 2007년 문헌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과지초당의 마당에는 오른손에 부채를 든 추사 동상이 서 있다. 초당 오른쪽에는 촌로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며 쓴 '大烹豆腐瓜薑菜'와 '高會夫妻兒女孫'이란 주련이 있다.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오. 최고의 훌륭한 모임은 남편·아내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이다.

왼쪽 누마루 기둥에는 '磨千十硏' '禿盡千毫'가 걸려 있다.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갈아 없애고, 1천여 자루의 붓을 닳게 했다"는 글귀에서 뽑은 것이다. 추사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과지초당 옆에는 추사박물관이 있다. 추사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추사의 생애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보여주는 '추사의 학예실', 일제강점기에 추사 관련 자료를 모아 과천시에 기증한 일본학자 후지츠카 부자를 기리는 '후지츠카 기증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1810년 연경 방문 시 추사와 옹방강이 나눈 필담(筆談) 문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한 후 친구 조인영(趙寅永)에게 보낸 편지, 제주 유배시절 이상적이 보내준 중국 서적인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은 추사가 말년에 자주 방문하고 머물기도 했던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다. 이곳에는 추사가 죽기 3일 전에 썼다는 걸작 '板殿'이 있다. 화엄경판을 보관할 경판전의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하며 이 글씨가 남게 된 것이다. 커다란 '판전' 글씨 왼쪽으로는 세로 작은 글씨로 '七十一果病中作'(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이 붙어 있다.

판전 안 왼쪽 벽면에는 불교를 보호하는 천신을 그린 '신중탱'(神衆幀) 불화가 한 점 걸려 있다. 그림에 대한 기록에는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草衣)선사가 증명(證明)으로 참여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 판전을 바라보고 왼쪽 언덕에는 1986년 세워진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가 서 있다.

추사의 마지막 모습은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이란 사람이 쓴 '추사방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56년 당시 13세의 상유현은 봄과 여름 사이에 몇몇 어르신들과 추사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가 묘사한 추사는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다.

"방 가운데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신재(身材)가 단소(短小)하고 수염은 희기가 눈 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같이 빛나고, 머리카락이 없고 중들이 쓰는 대로 엮은 원모(圓帽)를 썼으며 푸른 모시, 소매 넓은 두루마기를 헤치고 젊고 붉은 기가 얼굴에 가득했고, 팔은 약하고 손가락은 가늘어 섬세하기 아녀자 같고, 손에 한 줄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제공들이 배례(拜禮)를 하였다. 몸을 굽혀 답하고 맞는데, 그가 추사 선생인 줄 가히 알 수 있었다. 전에 듣건대 추사 선생이 다른 시대 사람 같다 하여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았으므로 그 기구(器具)와 얼굴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서울 봉은사의 판전 현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2월호 '역사기행'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2/13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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