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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비석 수수한 서체는 '인위'보다 '무위' 택한 결과"

정현숙 박사 '신라의 서예' 출간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주 남산 신성비 제2비. 591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풍부한 문자 자료를 남겼다. 삼국 통일 이전 자료 중에는 특히 6세기 비석이 많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501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년) 등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 시기 신라 비석은 학문적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지만, 서체에 대해서는 정연하지 않고 솜씨가 서투르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일부 학자들은 수수한 서체의 원인을 고구려와 백제보다 미성숙한 문화에서 찾기도 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미술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6∼10세기 신라 글씨를 주제로 쓴 논문 10편을 모은 책 '신라의 서예'에서 6세기 신라 비석의 서체가 후진적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2009년 경주에서 열린 포항 중성리 신라비(501년) 학술대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저자는 신라 금석문의 서풍이 전체적으로 예스럽고 질박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표면이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글씨를 새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라 비석 글씨는 성숙한 서법을 체득한 뒤에 쓴 것"이라며 "비석 글씨의 특이함은 인위보다는 무위를 택한 신라인의 성정이 드러난 결과"라고 강조한다. 즉 자연에의 순응을 의미하는 '천연성'(天然性)이 신라 서예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또 신라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서예 문화를 수용했지만,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이어 그는 6∼7세기 신라 토기와 목간에 남아 있는 글씨의 특징을 설명한다.

저자는 "신라 토기에서 나타나는 필법은 자유로우면서도 유창하다"면서 "함안 성산산성과 하남 이성산성, 경주 월성 해자에서 나온 목간의 글씨는 모두 힘차고 과감한 필치가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삼국 통일을 이룬 뒤 신라의 서체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통일신라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서풍을 표현하면서 당나라와 구별되는 그들만의 서예 문화를 창조했다"며 "서예가 김생과 최치원은 중국의 명필을 능가하는 독특한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고 말한다.

다운샘. 376쪽. 3만8천원.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1/12 07:4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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