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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음력 10월 말 몰아치는 강화 바다 '손돌 추위'

뱃사공 손돌 원혼 서린 강추위 전설…"기압 차로 냉기류 확장"
신미양요 당시 몰살 조선군 350여명 원혼 삼킨 '손돌목' 바다

[※편집자 주 = 개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작은 이야기를 엮으면 역사의 큰 물줄기가 됩니다. 미처 몰랐던 우리 고장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엮어가는 고리는 그 지역의 특산물일 수도, 음식일 수도, 문화유산일 수도. 지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실록이며, 또 다른 삼국사기이자 삼국유사일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 고장 이야기를 매주 하나씩 꾸미고자 합니다.]

강화 손돌목
강화 손돌목[연합뉴스 자료사진]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통상 음력 10월 말이면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몰아닥치기 시작한다. 절기로는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 즈음이다.

뱃사람들은 이때 불어오는 추위를 '손돌 추위'나 '손돌 바람'이라 부르며 배 타기를 꺼렸다.

이런 내용은 조선시대 정조·순조 연간에 활약한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음력 정월부터 12월까지 당시 풍속을 월별로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년) 중 '기타 10월 행사'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달 20일에는 해마다 큰바람이 불고 추운데, 그것을 손돌바람[孫石風]이라 한다. 고려 왕이 바닷길로 강화도에 갈 때 뱃사공 손돌이 배를 저어 가다가 어떤 험한 구석으로 몰고 가자 왕이 그의 행위를 의심하여 노해서 명령을 내려 그의 목을 베어 죽여 잠시 후에 위험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곳을 손돌목[孫石項]이라 한다. 손돌이 죽임을 당한 날이 바로 이날이므로 그의 원한에 찬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내용은 홍석모와 동시대를 살다간 학자 김매순이 열양(洌陽), 곧 지금의 서울 일대 세시기로 정리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중 10월 20일 대목에도 있다.

"강화 바다에 험난한 암초가 있어 손돌목이라 한다. 방언에 산과 물이 험난한 곳을 목[項]이라 한다. 일찍이 뱃사공 손돌이라는 사람이 있어 10월 20일에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으니 마침내 그 이름을 따서 지명을 지었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많이 불고 매섭게 추워 뱃사람들은 조심하고 삼가며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하고 근신한다."

이 고장 사람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 역시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구체적이다.

광성보 손돌목돈대
광성보 손돌목돈대[연합뉴스 자료사진]

고려 23대 고종이 몽골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하던 때였다.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새인 광성보를 지나자마자 뱃길이 막혔다.

초조해진 왕이 행차를 재촉했지만 뱃사공인 손돌은 침착했다. 그저 "지형이 막힌 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가면 뱃길이 트인다"고 아뢰었다.

고종은 자신을 붙잡아두려는 사공의 흉한 계략이라 여겨 손돌을 참수하라 명했다. 손돌은 죽음 앞에서도 조용히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는 바가지가 떠가는 데로만 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 일렀다.

결국 왕이 손돌이 가르쳐준 대로 바가지를 띄워 무사히 강화에 발을 내딛자 어디선가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비로소 잘못을 깨달은 왕이 크게 뉘우치고 말 머리를 베어 손돌 넋을 제사 지내니 그제야 풍랑이 그쳤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 뱃길 목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해 '손돌목'이라 부르고, 그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했다. 이곳은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가장 좁은 해협이다.

손돌목은 강화해협 중간쯤에 있다. 강화도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까닭에 이 해협은 어쩌면 바다라기보다는 큰 강처럼 보인다.

한데 하필 이 손돌목 지점에서 강화도와 맞은편 김포는 지그재그 형태로 땅이 어긋나게 돌출했다. 이런 곳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수로를 보호하며, 이를 통한 적군의 침투를 막기 위한 군사시설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손돌목 북쪽 강화해협의 더 좁은 지점 중 김포 쪽에 그 유명한 문수산성이 위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손돌목에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 방면에는 덕포진이 있고, 맞은편 강화도에는 손돌목돈대가 있다. 손돌목돈대 바로 북쪽에는 광성보라는 별도 보루 시설이 하나 더 있다. 이는 그만큼 군사적인 관점에서 손돌목 일대가 중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무대로 하는 근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다. 당시 손돌목은 조선군 350여 명을 삼킨 원혼의 바다였다. 그들은 또 다른 손돌이었다.

뱃사공 손돌의 묘
뱃사공 손돌의 묘[연합뉴스 자료사진]

손돌 추위가 냉기를 몰고 오는 시기는 기상학적으로 봐도 한반도 내륙에 강풍이 불어 드는 때다.

음력 10월 말 즈음이면 시베리아 고기압이 한반도로 세력을 넓히고, 적도 위쪽 북반구의 냉각된 기류가 내려오는 시기라고 한다.

김승배 한국기상산업협회 기상본부장은 "대륙 쪽에서 우리나라로 계절풍이 불어오는 음력 10월이면 말 그대로 을씨년스러운 추위가 시작된다"며 "기압이 서고동저 형태로 배치되고 두 지역 간 기압 차가 커지면서 찬 바람이 불어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뱃사람들이 꺼리는 손돌 바람도 이 같은 현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대륙 쪽 고기압 영향으로 강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파도가 높게 일뿐더러 풍랑주의보도 자주 내려질 수밖에 없는 때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후대 사람이 매서운 추위와 강풍을 이겨내며 전설을 지어냈는지도 모른다.

강화 해협과 손돌목이 바라다보이는 덕포진에는 손돌묘가 남아 있다.

백성들은 충정을 지킨 그를 손돌공(公)이라 부르며 조선조 말까지 계속 제사를 지냈다. 1977년에는 인근 주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해 묘를 재단장했다.

그렇다면 손돌 전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국어학자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는 전설의 뿌리를 파헤쳤다. 그에 의하면 손돌이라는 사람에게서 손돌목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외려 이 이야기는 지명에서 발전했다고 말한다. 원래 이곳 지명이 손돌이었고, 그에 착안해 사람들이 이런 전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고려사 이승휴(李承休) 열전의 한 대목을 든다. 당시 몽골 침략을 받고 대책에 부심하던 고려 조정에 이승휴는 다음과 같은 방책을 제시한다.

"적이 착량(窄梁)을 통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반쯤 지나가면 정예병을 보내 적 선단을 가로 끊어버린 후 강도(江都·강화도)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앞서 나간 적은 고립될 것이고, 뒤처진 적은 거점을 상실해 서로 호응하지 못할 터이니 적은 격파될 것입니다."

이 교수는 여기에 나오는 '착량'이 바로 '손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용비어천가에서 왜적이 강화 쪽으로 침입해 강화부(江華府)와 착량의 전함을 불지르며 크게 기세를 올린 일을 거론하면서 이 착량을 손돌이라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용비어천가는 착량이 "지금 강화부에서 남쪽으로 30리가량 되는 곳"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미 이승휴 시대 고려 중기에 지금의 손돌목은 손돌로 일컬었으며, 바로 이런 지명에서 손돌이라는 가공의 원혼 많은 인물을 백성들이 만들어냈다고 했다.

손돌목에서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손돌의 넋을 기리고자 음력 10월 20일마다 '손돌공 진혼제'를 연다. 김포시는 올해로 47년째를 맞는 이 진혼제를 다음 달 지낼 예정이다.

chams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11/11 11: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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