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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러시아혁명 가담한 유일 한국인은 여성이었다

송고시간2017/04/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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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올해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러시아사회민주당)은 1917년 소비에트정권을 세운다.

볼셰비키 혁명은 세계 사회주의 확산의 시발점이다.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도 혁명 여파로 생겼다.

러시아혁명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여성인 김 알렉산드라(1885~1918)가 가담한다.

활동 무대는 러시아 극동 연해주와 하바롭스크다.

한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온 것은 1860년 이후다.

1921년에는 5만 7천여 명에 달했다.

학정과 극심한 생활고를 피해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이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부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라는 어려서부터 외국어에 능통했다.

러시아어와 중국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만주철도 건설현장 통역관을 지낸 함경도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성장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2살 때 여의고 10살 때는 아버지마저 잃는다.

고아가 된 알렉산드라는 폴란드인에게 맡겨져 교사로 일하다 주인 아들과 결혼한다.

한국인으로서 러시아혁명에 유일하게 가담한 김 알렉산드라

결혼은 실패로 끝난다. 남편의 잦은 음주와 도박이 원인이었다.

두 아들을 둔 그는 1914년부터 사회주의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머나먼 우랄산맥 벌목장을 찾아가 통역을 자처한다.

1차대전 발발 후 군인으로 징집돼 벌목장에 끌려온 조선인과 중국인 등을 돕기 위해서다.

이들은 외부 출입이나 서신 연락마저 차단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명령에 불응하다 집단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임금은 거의 받지 못했다.

알렉산드라는 체불임금을 받아주는 등 징용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선다.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에 늘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그는 성격까지 쾌활해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1916년에는 볼셰비키 정당에 가입해 극동지역 임무를 맡는다.

혁명이 임박하자 대중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다.

계급투쟁과 민족 해방운동의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공장과 노동현장에는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1917년에는 혁명 지도부가 활동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온다.

혁명 이후에는 극동 인민공화국 외무위원에 임명된다.

당시 연해주 조선신문은 "벌목장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수천 명을 해방한 알렉산드라는 볼셰비키 남자보다 더 용감했다"고 보도했다.

1918년 5월에는 한국 최초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한다.

독일 밀정으로 오해받아 체포된 이동휘를 구해준 게 인연이 됐다.

이동휘는 이듬해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오른다.

한인사회당은 아시아 민족 가운데 최초로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단체다.

러시아 지원을 받아야만 독립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볼셰비키를 민족해방 지렛대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혁명 정부에서 운영비를 지원받아 사관학교를 만들고 군사조직을 창설한다.

기관지인 '자유종'도 운영한다.

김 알렉산드라는 "총부리를 자본가와 사무라이 장군에게 돌려라"라고 적힌 전단을 일본군에 뿌린다.

그러나 머잖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1918년 9월 15일 반혁명군(백군)에 검거된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당당하게 맞선다.

혁명에 왜 가담했느냐는 백군 질문에 "조선인은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해야만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답했다.

사흘 뒤 총살당할 때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마지막 소원으로 "8보만 걷게 해달라"고 외쳤다.

그 이유를 묻자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한발 한발에 조선 민중과 노동자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고 대답한다.

곧이어 총살당해 숨졌고, 시신은 뒤편 아무르 강에 던져졌다. 그때 나이 33세였다.

조선인과 중국인은 아무르강을 각각 흑룡강, 헤이룽강으로 부른다.

하바롭스크 주민은 알렉산드라 죽음을 애도해 한동안 아무르강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총살 현장에는 추모탑이 솟아 있다.

정부는 2009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두 아들 중 장남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차남은 2차대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라가 활약한 하바롭스크 일대는 우리 민족과 악연이 깊다.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독립군의 모습. 맨 앞쪽에 앉아 있는 이가 김좌진 장군이다

조선군은 1654년, 1658년 청나라 요청으로 하바롭스크에 두 차례 파병돼 러시아군을 무찔렀다.

러시아군은 백두산 모피를 찾아 내려오다 조선군에 패해 남하를 중단해야만 했다.

나선정벌로 불리는 이 전투는 조선이 국제전에 개입한 첫 사례다.

하바롭스크 인근 스보보드니(자유시)는 항일독립군에게 한이 서린 곳이다.

대한독립군단이 1921년 이곳에서 몰살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군대와 한인 적군이 포위공격을 감행해 960여 명이 죽고 1천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됐다.

청산리 전쟁과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이 전멸함으로써 해방 때까지 대규모 무장투쟁은 사실상 사라졌다.

1937년에는 스탈린이 연해주 일대 조선인 17만여 명을 시베리아로 강제이주시키는 참상이 빚어진다. 당시 2만5천여 명이 사망한다.

스탈린은 일본군 첩자 차단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소수민족 해체가 본질이라는 게 정설이다.

민족해방과 평등사회를 위해 몸 바친 알렉산드라가 신봉한 공산세력이 되레 조선 독립운동을 말살하고 무고한 양민을 짓밟는 '이념 역설'이 생긴 것이다.

had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4/20 09: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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