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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일본 사무라이 전설은 허구…실체는 배신 일삼는 삼류 칼잡이

송고시간2017/06/22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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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일본에서 반려동물에 입힐 사무라이 갑옷이 최근 국내외에 시판돼 동물 학대 논란을 빚고 있다.

'사무라이 에이지'라는 업체는 일본 봉건시대 전투복처럼 생긴 특수 의상을 애완용 고양이나 개가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한 벌당 약 20만 원에 팔고 있다.

발포수지와 우레탄 소재로 제작한 갑옷은 크기만 작을 뿐 모양과 색깔은 사무라이 복장과 유사하다.

사무라이가 목숨 바쳐 주군을 섬기는 무사라는 점에서 집주인을 충실하게 따르는 반려동물에게 전통 무사 복장은 참신하고 어울린다는 반응이 나온다.

개나 고양이가 금속 조각을 이어 만든 갑옷을 착용하면 큰 불편을 느낄 게 분명하므로 동물 학대라는 비판도 만만찮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 정신은 과도하게 미화되고 왜곡된 만큼 갑옷과 반려동물은 최악의 결합이라는 지적마저 제기된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는 귀족이 왕을 제치고 중앙권력을 장악한 10세기 전후에 등장한 듯하다.

항상 칼을 차고 다니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헤이안 시대(794~1185년)만 해도 사무라이는 승마와 활을 중시했다.

전쟁이 나면 말에 올라 활을 쏘았고,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만 칼을 썼다.

사무라이들이 칼 두 자루를 갖고 다닌 것은 전국 다이묘(영주)들이 영토전쟁을 벌이던 센고쿠 시대(15~16세기)다.

불순물이 많은 모래 속 철(사철)을 주원료로 삼은 탓에 부러지기 쉬워서 실전용 칼 외에 비상용으로 한 자루를 더 휴대한 것이다.

평민도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 이후에는 신분 이동이 제한된다.

이때부터 사무라이는 신분 대물림은 물론, 막대한 특권까지 누린다.

부녀자를 겁탈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평민을 멋대로 죽일 수도 있었다.

일반인은 사무라이 비위를 거스르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두려움에 허리를 연신 굽히며 살아가야 했다.

일본인이 늘 웃으면서 친절을 과도하게 베푸는 습관은 이런 죽음 공포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무소불위인 사무라이도 주군인 다이묘에게는 고양이 앞에 선 쥐와 같다.

다이묘가 홧김에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할복하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해서 충성심을 입증해야만 하사받은 농지와 사무라이 특권을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지거나 주군에게 밉보여 영지를 빼앗기면 가족 전체 밥줄이 끊겨 하루아침에 평민 신세가 된다.

사무라이는 낭인이 돼 굶주리고 헐벗어도 좀처럼 칼을 내려놓지 않는다.

농업이나 상업 등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고 구걸로 연명하거나 전쟁 용병,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전쟁터 등을 기웃거리다가 새로운 주군을 만나 공을 세우면 옛 지위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19세기 당시 일본 사무라이 모습

떠돌이 깡패로 살아가는 낭인은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의 전신이다

임진왜란 이후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도쿄)에 군사정권을 수립한 1603년 이후에는 사무라이 역할이 크게 달라진다.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평민 지위가 향상되자 사무라이 위세는 상대적으로 위축된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살해하는 권리도 박탈당한다.

사무라이는 다이묘 밑에서 특정 지역을 다스리는 공무원 노릇을 한다.

무예는 꾸준히 수련하지만 전쟁할 일이 없어져 칼 솜씨는 크게 둔해진다.

현대인이 기억하는 멋진 사무라이 이미지는 에도 시대에 형성된다.

일본도를 옆구리에 차고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모습이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서구식으로 바꾼 메이지 유신(1867년) 체제에서는 사무라이가 사라진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신식 군대에 맞설 능력이 없는 데다 군과 경찰을 제외한 민간인 칼 소지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2004년 개봉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나 일본 만화 등에서는 사무라이가 국가와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치는 정의의 사도로 묘사된다.

명예를 중시한 나머지 할복자살도 서슴지 않는 지조 높은 무사로 미화되기도 한다.

실제 사무라이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힘 있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만 의리를 지키고 충성했다.

강한 적을 만나면 목숨 걸고 끝까지 싸우는 게 아니라 일찌감치 투항하거나 주군을 배신하는 사례가 많았다.

맞대결을 선호한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년)가 일본 최고 사무라이로 추앙받는 것은 배짱 있는 무사가 그만큼 없었다는 반증이다.

대다수 사무라이는 상대가 방심할 때 기습으로 죽이는 것을 선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비호같이 칼을 빼 들어 찌르거나 베는 동작을 수시로 익히고 손자병법을 공부한 것도 선제공격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손자병법 가운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 구절은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상대를 철저히 파악하고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선제공격을 거침없이 감행한 것이다.

명성황후 살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진주만 공습, 태평양전쟁 등은 하나같이 비겁한 기습공격이었다.

힘이 약한 곳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때리는 것도 사무라이 특징이다.

약자를 떼 지어 괴롭히는 집단 따돌림(이지메)이 일본 사회에 만연한 것도 비열한 사무라이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선전은 허구였다.

전쟁터에서 구슬처럼 부서진다는 옥쇄작전을 입버릇처럼 외쳤지만 1945년 일왕 항복 이후 자살한 일본군 장교 숫자는 독일 나치 장교와 비슷했다고 한다.

소련 강제수용소에서는 비겁한 사무라이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포로가 된 일본 관동군 약 60만명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소련에 앞다퉈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약자 배려와 동정은 사무라이 유전자가 아니었다.

1970년대 베트남 보트피플 약 10만 명이 동해에서 표류하면서 구조를 애타게 요구했을 때 잔인무도한 냉혈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구하지 않고 모두 죽음의 바다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남해 등에서 사투를 벌이던 베트남 난민을 한국이 받아들인 것과 대조적이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했다던 지도자들의 가면이 벗겨졌다.

사무라이는커녕 시정잡배만도 못한 삼류 칼잡이가 그들의 본모습이었다.

가미카제(자살공격)를 강요한 도조 히데키 총리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전쟁 책임을 일왕 등에게 떠넘기는 추태를 보였다.

동부 헌병 사령관 오타니 게이지로는 가짜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위장하고서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도주했다가 체포된다.

생체실험을 주도한 이시이 시로 731부대 사령관은 실험자료를 미국에 몽땅 넘겨주고서 처벌을 피하는 추악한 뒷거래를 한다.

일본인이 평소 친절하고 부드럽다가도 일단 국가 권위 아래 뭉치면 야수로 돌변하는 데는 비겁한 칼 문화의 영향이 크다.

아베 총리가 교전권을 부인하는 평화헌법 제9조를 바꾸려고 개헌 분위기를 꾸준히 조성하는 것은 이러한 국민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이나 식민지배와 같은 참변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비분강개만으로는 안되고 일본의 환한 웃음 속에 감춰진 섬뜩한 칼을 찾아내야 한다.

일본 사무라이들이 행동강령으로 삼은 '지피지기 백전불태' 전략은 우리도 벤치마킹해야 한다.

had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6/22 08:1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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