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서 공교육 불만 '솥뚜껑 시위'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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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연합뉴스 자료사진) 칠레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거리 행진 |
민정 출범 이후 첫 '식기 난타' 시위…"現 정부 고립 증거"
'공교육 파탄ㆍ학비 상승' 민생 위협..집회 장기화할 듯
(산티아고=연합뉴스) 김태균 기자 = "땅땅, 땅땅, 땅땅..."
지난 4일과 9일 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가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로 들썩였다. 수많은 시민이 집안에서 들고 나온 솥과 프라이팬을 마구 두들겼기 때문이다.
'까세로라소(Cacerolazo)'라는 이 전통적 시위는 예전부터 남미에서 대중의 불만이 폭발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말의 어원인 '까세로라(Cacerola)'는 스튜를 끓일 때 쓰는 솥을 말한다.
칠레에서 까세로라소가 나타난 것은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집회가 일어나던 1980년대 말 이후 처음이다.
시민들은 이제 독재가 아닌 최악의 공교육에 분노하며 솥뚜껑을 두드린다. 4일과 9일은 학생과 교사들이 교육 재정 강화를 촉구하며 칠레 전역에서 사상 최대의 거리 행진을 벌인 날이다.
많은 칠레인은 까세로라소를 신호로 민심이 정부를 등졌다며, 지난 5월부터 계속된 교육 집회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거리에 경찰이 쏜 최루가스가 자욱하고 많은 학교에 책걸상 바리케이드가 쌓이는 불편을 감수해도 '더 나은 학교'를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안 속는다"
교육 개혁 촉구는 이미 칠레에서 해묵은 사안이다. 2006년과 2008년 학생들이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지만 정부는 이들을 달래기만 했을 뿐 실제 교육 제도를 고치는 작업은 차일피일 미뤘다.
이 때문에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국가가 실질적 조처를 하기 전에는 물러서지 못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요구안도 1980년대 군사독재 때 시작된 체제를 뿌리부터 뒤집자는 내용이 많다. 무상 공교육 보장과 차등 학교 지원제(스쿨 바우처ㆍSchool Voucher) 폐지, 교육 영리 활동의 형사처벌제 도입 등이 그 예다.
집회를 이끄는 칠레대 학생회(FECH)의 레베카 가에테(산업공학 4년)씨는 1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얼마까지 시위를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까세로라소를 통해 정부가 고립된 처지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국민이 지지하는 투쟁인 만큼 올해 내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와의 협상은 난항이 예상된다. 기업인 출신으로 우파 보수 성향이 강한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무상 교육안을 완강히 거부하기 때문.
앞서 피녜라 대통령은 대안으로 교육 기금의 확충과 취약 학생에 대한 장학금 증설, 학자금 대출제 개선 등을 제안했으나 '미봉책'이라는 반발만 샀다. 현재 그의 지지율은 26%로 칠레 민정 출범 이후 최저다.
칠레 가톨릭대의 로베르토 두란 교수(정치학)는 "많은 국민은 피녜라 정부가 교육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마저 잃었다. 교육은 대통령에게 가장 큰 정치적 문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시위대가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다며 진압 의지를 고수해 양측의 충돌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학생들은 문화 퍼포먼스로 응집력을 다진다. 산티아고 대통령궁 앞에서는 무상교육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1천800시간 동안 건물 주변을 마라톤으로 도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다.
가에테 씨는 "경찰이 진압 명분을 만들려고 시위대로 변장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도 있다. 우리는 평화 집회 원칙을 계속 지킬 것이다"고 주장했다.
◇ "학교 간 격차, 인종 분리 수준"
중남미의 대표적인 부국(富國)인 칠레는 원래 인근 국가 중 교육 여건도 가장 양호한 곳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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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연합뉴스 자료사진) 현 교육체제를 퍼포먼스로 풍자하는 학생들 |
멕시코의 연구기관인 에토스(Ethos) 재단이 올해 발간한 빈곤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칠레는 교육을 못 받은 가장(家長)의 비율이 3.7%로 브라질(14.5%)과 멕시코(9.5%) 등 중남미 핵심 국가 8곳 중에서 수치가 가장 낮다.
그러나 불만은 심각한 교육격차에서 터졌다. 1980년대 군사 정권은 시장주의 경제 정책을 펴며 공교육에 '경쟁 중시' 원칙을 도입했다.
학생들이 몰리는 우수한 공ㆍ사립학교에 예산을 더 많이 지원하는 스쿨 바우처 제도를 시행했고, 효율성을 높이고자 중앙 정부 대신 지방자치단체에 학교 재정 권한을 넘겨줬다.
학비가 공짜인 공립학교는 빠르게 몰락했다. 여건이 훨씬 좋은 사립학교로 학생과 교사가 빠져나가고 재정난에 수업 수준이 곤두박질하는 악순환이 거듭된 것이다.
교육개혁 시민단체 '에두까시온 2020'의 마리오 와이스블러쉬 회장(칠레대 교수)은 이런 상황을 사회 공정성을 해치는 '교육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ㆍ인종분리정책)'로 불렀다.
사립교의 부유층 자제들은 90% 이상이 우수대학 합격 점수를 거뜬히 따지만, 공립교의 중하층 아이들은 아예 학업을 포기하고 폭력과 비행에 빠져 신분 상승은 꿈도 못 꾼다는 것이다.
와이스블러쉬 회장은 "칠레에서 이뤄진 신자유주의식 교육 실험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수준이었을 것"이라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학교 불평등 지수를 보면 칠레는 64개국 중 2위로, 21위인 한국보다 훨씬 문제가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 살인적 등록금에 빚까지.."더 못 참아"
학비 부담은 서민들의 '까세로라소 민심'을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이다.
지난해 OECD 통계에 따르면 칠레 중ㆍ고교생 중에서 공립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은 각각 48.5%와 42%다. 나머지는 한화 기준으로 매월 7만∼200만원의 수업료를 매기는 사립 또는 반(半)사립학교에 다닌다.
산티아고 인근의 한 반사립학교에서 운영이사를 맡은 교민 최선택(59) 씨는 "소수 사례를 제외하면 공립교 상황이 대체로 나빠서 돈을 크게 못 벌어도 무리해서 아이를 비(非)공립에 보내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대학에 진학하면 부담은 더 커진다. 칠레 정부의 대학교육 지원액은 GDP(국내총생산)의 0.3%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에 크게 못 미친다.
한국의 서울대와 동격인 국립 칠레대도 전체 예산에서 정부 지원금 비율이 10% 초반에 불과하다. 등록금이 비쌀 수밖에 없다.
칠레대 1년 학비가 200만∼450만 칠레페소(한화 약 480만∼1천80만원)나 하고 사립대는 연 700만 페소(1천680만원)에 달하는 곳도 있다.
판매직이나 하층 노동자의 월급이 30만 페소(약 72만원) 이하에 불과한 상황을 볼 때 서민들이 체감하는 학비 수준은 한국보다도 훨씬 높은 셈이다.
중하층 학생들은 대다수 정부나 은행의 융자로 학자금을 해결하지만 이자가 7∼10%에 달해 졸업 후에도 빚에 허덕인다.
대학생 아들을 둔 하이메 피게소아(53ㆍ인쇄업) 씨는 "아이가 대학을 나와 10년 넘게 등록금을 갚아야 한다니 말이 되느냐. 최소한 국립대는 무상이 되어야 하고 사립대 학비와 학자금 이자도 대폭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칠레가톨릭대의 길레르모 우르말드 교수(경제사회학)도 "경제 성장으로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중산층이 늘었지만, 비싼 교육이 이들을 도로 극빈층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발이 센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ta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8/15 14:24 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