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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영도다리 밑에는 왜 점집이 많았을까

6·25 피란민 100만명 몰렸던 '애환'과 '희망'의 현장
건설 당시 숨진 韓·中 노동자의 한 서린 '희생의 다리'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영도대교 도개 모습.
영도대교 도개 모습.[연합뉴스 자료사진]

피란 시절 애환을 담은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 중 일부다.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노랫말 때문인지 오늘날 사람들에게 영도다리(공식명칭 영도대교)는 6·25 전쟁 당시 이산가족을 위한 만남의 장소나 전쟁의 아픔이 담긴 애환의 장소로 많이 기억된다.

하지만 영도다리에는 어두운 수탈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과 수송로 구축을 위해 영도다리를 만들었다.

당시 부산의 거부인 하자마 후사타로오(迫間房太郞)는 영도에 얼마나 많은 땅을 보유했던지 영도다리가 하루 몇 번 올라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하자마 땅값 올라간다"며 비아냥 됐다는 풍문도 있다.

1934년 개통 직후 옛 부산 영도다리
1934년 개통 직후 옛 부산 영도다리[영도문화원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 희생의 다리…"영도다리 건설 희생자 위령탑은 어디에"

1932년 착공해 약 3년이 걸린 영도다리 공사에 수많은 막일꾼이 동원됐다.

부산 영도다리 건설계획 담은 도면
부산 영도다리 건설계획 담은 도면[영도문화원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일꾼은 '빈민구제사업'이라는 사탕발림 같은 구호로 벽보와 광고를 통해 모집했다. 이 사업에 동원된 사람은 4만3천800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구리(苦力)'라 불리며 1920년대 굶주림을 피해 산둥반도에서 부산으로 넘어온 중국인 노동자가 다수 포함됐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체 공사 인원 중 중국 막일꾼은 20∼30%에 달했다고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엄청난 희생이 강요된 노동이었다. 그들이 쥔 하루 품삯은 55전. 당시 쌀 한 되가 15전, 담배 1갑이 5전, 고무신 한 켤레가 35전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품삯은 한 식구가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빠듯한 돈이었다.

바다 위에 다리를 세우는 일도 생소한데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도개교로 건설되는 영도다리는 엄청난 난공사였다.

당시 섬과 육지 간 거리가 약 600m였는데 도개교로 건설하기에는 200m가 최적이라는 판단과 건설비 절약을 위해 400m 바다를 매립해야 했다.

섬 쪽은 봉래산을 깎았고 육지 쪽은 용미산을 깎아 바다를 메웠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희생됐다.

산사태가 나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가 하면 다리 공사 때도 희생자가 속출했다.

착공 4개월 만에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시 부산부(釜山府)가 공식 집계한 한국인 사상자는 사망 17명, 중상 41명이다.

중국인 사상자들도 많았는데 이들의 희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산사태가 나 중국인이 한 번에 6명이 매몰됐는데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이 때문에 영도다리는 '유령의 다리'라는 별명을 달고 있었다.

영도다리 공사 중 죽은 귀신들이 밤마다 나타나 일본인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영도 남항동과 대평동 일대에 사는 일본인들이 공포심에 휩싸여 밤에는 외출을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궁리 끝에 가미사마(일본의 신)를 모신 사당을 만들었고, 그 사당이 지금 영도에 있는 용신당의 전신이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영도다리 위령탑의 흔적 (초록색 동그라미)
사진으로 남아 있는 영도다리 위령탑의 흔적 (초록색 동그라미)[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영도다리가 건설되고 한참 뒤에야 건설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 푼돈을 모아 영도다리가 잘 보이는 영선 고개에 위령탑을 세웠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 상생의 다리…"쇠로 된 다리가 정말 올라가 배가 다닐 수 있을까"

영도다리 건설 전 영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나룻배가 전부였지만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특히 해운업자는 다리가 생기면 영도를 둘러 운항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나온 절충안이 상판을 들어 올리는 도개교 방식의 건설이었다.

다리를 들어 올려 뱃길을 터줌으로써 바다와 육지가 상생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당시로는 상상도 못 한 기상천외한 방식이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까지도 사람들은 영도다리가 올라간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난공사였던 만큼 개통 시기도 세 차례나 연기됐다.

영도다리를 설계한 일본인 야마모토우타로(山本卯太郞)는 다리가 들리는 장관을 보지 못한 채 개통 8개월 전에 심장마비로 숨졌다.

세간에는 그가 도개교를 만들지 못해 자살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통식은 1934년 11월 23일에 열렸다. 6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당시 부산 인구가 15만명, 영도 인구는 5만명이었다고 하니 새로운 풍광이 장관이기는 했다.

개통식 날 영도다리가 도개하자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부산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1934년 영도다리 개통식
1934년 영도다리 개통식[영도문화원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 희망의 다리…"영도다리 밑 그 많던 점집 다 어디로 갔을까"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은 "죽기 전에 영도다리 구경하는 게 꿈"이란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국 곳곳에 영도다리에 관한 입소문이 났다.

소문 속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중 피란민들에게 만남의 장소이자 희망이 됐다.

영도다리는 아픔의 다리이기도 하지만 전쟁 당시 희망의 다리였다.

"살아있다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

피란길 헤어짐이 임박했던 순간 그들이 머릿속에 떠올린 장소는 어김없이 영도다리였다.

하지만 영도다리에 도착한 피란민은 100만여 명을 헤아렸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그들은 다리를 떠나지 못했다. 6·25 당시 부산 인구가 30만 명이었다.

가족의 이름을 적은 종이나 헌 옷이 영도다리 양쪽 난간에 빽빽하게 붙었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기도 했다.

하루에 27명이 다리 위 달빛을 바라보다 뛰어내렸다는 수상경찰서(현 영도경찰서) 기록도 있다.

경찰은 '잠깐만'이라는 팻말을 다리 위에 붙였다.

"헤어진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요"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한 치 앞을 모를 삶을 위안받고 싶은 마음에 점집을 찾기 시작했다. 영도다리 주위는 점집이 퍼져나가 '점바치 골목'을 이뤘다.

당시 목조가옥 형태의 점집이 80여 곳에 달했고, 돗자리 형태의 점집까지 포함하면 120여 곳에 이르렀다.

목조가옥은 영도다리 건설에 사용된 자재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1952년 영도다리 주변 점바치 골목
1952년 영도다리 주변 점바치 골목[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점집은 3년 전 사라진 '소문난 대구 점집'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피란민들은 영도다리를 떠나지 못하고 영도다리 주변에서 살았고 그곳은 부산의 원도심이 됐다.

영도다리는 아픔과 절망의 순간에도 이곳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다리였다.

영도다리 관광해설사로 활동하는 강태인 영도구 문화관광 자문위원은 "이 다리를 찾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영도다리를 만들었데요.", "피란길 약혼자와 헤어졌는데 영도다리 위에서 다시 만났어요.", "영도다리 아래 점집에서 점을 본 후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등등이다.

영도다리 아래 푸른 갯물이 흐른 지 80년이 넘었다.

영도다리는 그 세월 동안 우리가 겪은 격동의 물굽이를 다 지켜보고 다리를 건넌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품어준 역사의 '말 없는 증인'이다.

handbrother@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12/23 11: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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