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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낳기는 했지만 기를 형편이 못돼 아기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상자인 '베이비 박스'(Baby Box)가 서울의 한 교회에서 국내 처음으로 도입된 지 5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길거리나 화장실 등에서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도된 민간 시설로, 지금까지 300여명의 아이가 이 곳을 통해 맡겨졌습니다. 하지만 베이비박스의 필요성과 합법화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미디어랩은 이 베이비박스의 운영실태, 순기능과 역기능을 살펴봤습니다. 이 기사는 보다 생생한 전달을 위해 인터랙티브 뉴스 형식으로도 제작됐습니다.

2013.10.25

(서울=연합뉴스) 이민지 기자 = 갓난아이를 안은 10대 소녀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비탈진 언덕을 힘겹게 오른다. 행여 누가 볼세라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출산한 지 채 2시간도 안된 어린 산모의 몸은 무겁기만 하다. 소녀가 한걸음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를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출산 후 하혈이 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언덕위 한 골목에 다다른 소녀는 교회 담벼락에 있는 자그마한 베이비박스의 철문을 열고 그 안에 아이를 넣는다. 이어 '딩동' 벨이 울리고 건물에서 노년의 한 남성이 황급히 달려나온다. 남성은 실신할 지경인 소녀를 부축한다.

건물 안에서는 한 여성이 버려진 아이를 상자에서 꺼내 재빨리 기저귀를 채우고 어린 생명의 몸을 따듯하게 보호한다. 소녀는 미역국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 교회를 떠났다. 그녀의 아이는 며칠 뒤 보육기관으로 보내졌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신림동의 한 교회에서 최근 있었던 상황이다. 직접 낳고도 육아를 할 사정이 못되는 부모들이 때로는 실명으로 때로는 익명으로 아이를 놓고 가는 곳인 베이비박스란 어떤 곳일까.

신림동에 있는 국내 유일의 베이비박스

베이비박스란?

베이비박스는 아기를 기를 수 없는 부모가 아기를 잠시 맡길 수 있도록 고안된 시설이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는 이 박스를 운영하는 시설에서 임시 보호를 받은 뒤 정식 보육시설로 보내진다. 대부분의 베이비박스는 한 명의 아기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다. 베이비박스에 아기가 놓이면 센서가 이를 감지해 곧바로 경보음이 울린다. 경보음을 들은 운영 시설 관계자가 아기를 베이비박스에서 꺼내 보호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베이비박스 역사를 살펴보면 12세기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세 수도원에서 버려진 갓난아기의 생명을 살리고자 도입했던 '기아(棄兒) 회전판'(foundling wheel)을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보편화됐던 베이비박스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최근 10년새 센서 등을 갖춘 '첨단 버전'으로 재등장했다. 현재 베이비박스는 독일, 폴란드, 일본 등 세계 18개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합법시설로 운영되지만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인권 침해와 아기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민간 단체가 대신 맡고 있다.

관악구 신림동의 다세대주택 밀집 구역. 가파른 언덕 위 공터를 지나 숨이 찰 때면 베이비박스가 근처에 있음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나타난다. 표지판을 따라 대문이 있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면 자그만 교회 담벼락에 베이비박스가 등장한다. 담벼락에 설치돼 자칫 냉장고나 소화시설로 착각할 수도 있는 모양새다.

철제 손잡이를 돌려 박스 문을 열자 반투명 초록색 단열재로 마감된 가로, 세로 각 1m가 안 되는 공간 내부가 드러난다. 상자안에는 '출생일을 남겨주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아이들이 나중에 부모를 찾을 때 단서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조명이 켜지며 바닥에 깔린 하얀 수건을 비춘다. 수건에 손을 올리자 센서가 동작을 감지해 경보벨을 울린다.

"처음엔 정말로 아기가 들어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베이비박스가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아이들만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죠. 그러다 2010년 3월에 첫 아기가 들어왔어요." 베이비박스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해 운영하는 이종락(60) 주사랑공동체교회 목사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조명과 발열 전기코일이 장착된 상자를 교회 담벼락에 설치한 것은 2009년 겨울.

아이가 들어왔음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면 그는 바로 달려 나와 아이의 부모를 붙잡는다. 그의 아내는 교회 담벼락 안쪽 베이비박스 문을 통해 아이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은 불과 몇분 사이 순식간에 이뤄진다. 이 목사는 5년째 이곳에 맡겨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보육센터로 아이들을 보내기 전 사나흘간 우는 아이들을 손수 달래며 끼니도 챙긴다.

급증하는 아이 수…합법화가 해결책?

베이비박스를 찾는 부모는 두 종류로 나뉜다. 아기를 다시 찾으러 오는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 이 목사는 아이를 맡기러 온 부모가 발걸음을 돌리기 전 이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벌인다. 나중에라도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면 각서를 받고 약속된 기한까지 아이를 돌봐준다. 일부 부모는 아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만 맡아달라면서 쪼갠 생활비로 분유값과 기저귀값을 부쳐주기도 한다. 아기에 대한 부모의 책임감의 표시다.

베이비박스 보호 현황

"지금까지 이곳에 온 아이들 300명 중 50명 정도는 부모가 데리고 갔어요. 보육센터에서 찾아간 경우까지 포함하면 100명 정도는 부모 품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부모도 있다. 이럴 때는 소식이 끊긴 부모를 인터넷으로 수소문해 의사를 확인하고 아이를 입양 보낸다. 그런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베이비박스에 처음 왔던 아이 '모세'처럼 출생일만 남겨져 친부모와의 모든 끈이 끊긴 경우도 있다. 시간이 갈수록 베이비박스로 오는 아이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첫해 4명에 불과했던 아이 수는 올해 10월까지 벌써 200명을 넘어섰다. 교회 겸 사택으로 쓰는 이층집에서 본인의 아이들을 포함해 19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이 목사 부부의 힘이 부칠 수 밖에 없다. 이 목사가 베이비박스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이유다.

"일부 외국에서는 베이비박스가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우리도 그래야 해요. 제가 버려지는 아이를 수없이 받아 살리고 보육센터로 넘겨주는 동안 우리 정부는 뭘 했죠?" 교회 자료에 따르면 독일, 체코 등 일부 유럽과 일본, 말레이시아 등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도 베이비박스가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미국에는 친부모가 익명으로 신생아를 맡겨둘 수 있도록 한 '안전 피난처(safe haven) 법'이 있다. 이 목사는 미인가 시설로 운영되는 지금의 베이비박스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운영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소방서, 병원 등 공공시설이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선의로 시작했지만…인권침해 우려도

베이비박스를 향한 관심만큼 부작용에 대한 걱정스러운 시선 또한 늘고 있다. UN아동권리위원회는 독일, 체코 등 일부 유럽 국가에 설치된 베이비박스가 당초 의도와 달리 영아 유기를 부추긴다며 철거를 강력히 권고했다. 한국 정부도 베이비박스가 미인가 시설이고 유기 영아가 베이비박스로 집중된다며 철거를 요구한 바 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작년 한해 유기 영아의 절반 가량이 베이비박스에서 발견됐다. 일각에서는 베이비박스가 애초의 선의와 달리 모자의 인권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해외입양인 전용 게스트하우스 '뿌리의 집'을 운영하는 김도현 목사는 "아이 엄마가 원치 않아도 아이의 조부모나 아버지가 베이비박스를 이용할 수 있다"며 베이비박스의 익명성에 걱정을 드러냈다. 김 목사는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놓고 가는 부모는 영아 살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피한 부모이므로 정부가 이들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혼모에게 매달 지급되는 7만원 가량의 지원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올리고 이들을 향한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비박스가 있어서 (유기 외에는) 또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됐습니다. 베이비박스가 다음 선택에 대한 고민을 너무 쉽게 덜어준 거예요." 실제 베이비박스 100여개가 운영되는 독일에서는 전문적인 상담을 통해 부모가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을 최대한 장려한다. 아이를 버리기로 선택한 부모에게도 신상정보를 의무적으로 받아 아동의 '알 권리'를 보호한다.

이종락 목사 또한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없어져 부모가 직접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하지만 당장 거리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도 없다고 한다. "저도 당연히 베이비박스가 없는 나라가 좋죠. 하지만 지금 대안이 없어요. 생명이 인권보다 먼저입니다."

베이비박스 앞면에는 아이를 맡기기 위해 오는 부모를 향한 간절한 호소 문구가 붙어있다. "지금 안고 있는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입니다." "세상에서 이 아이를 가장 사랑해 줄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홀로 아기를 키우기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는 한 또 한 명의 엄마가 이 호소문 앞에서 핏덩이를 놓고 힘겨운 선택을 해야할 것이다.

mi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