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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대원군도 인정한 호남 유학의 본향 장성

반경 10㎞ 안에 김인후·기정진 등 성리학자 고향 많아
필암서원·백비 등 선비 관련 유적도 곳곳에 수두룩

(장성=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전남 장성역 앞에 선 큼지막한 선돌에 적힌 문구다. 글[文]로는 장성만 한 데가 없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조선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전라도 53개 고을을 둘러보고 장성을 두고 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을까.

30대의 젊은 고봉(高峰) 기대승이 당대의 거유(巨儒) 퇴계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실상 장성을 시발지로 삼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논쟁 제기에 앞서 고봉은 당대의 또 다른 거유로 인근 장성 땅에 사는 하서(河西) 김인후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주제로 하는 또 다른 성리학 토론을 벌인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그는 마침내 퇴계를 향한 비판을 개시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유학계를 뜨거운 철학논쟁으로 이끈 이들 세 사람 중 하서가 장성 출신이며, 고봉은 장성과 바로 붙은 지금의 광주 광산구 태생이다.

최근 '옐로시티' 마케팅으로 떠오르는 장성은 2017년 말 현재 인구 4만7천여 명에 불과한 작은 고을이다. 이 작은 고을이 동시대 경북 안동에 비견하는 조선 시대 호남 성리학의 본고장이다. 흥선대원군이 이 고장을 저리 평가한 까닭이다.

◇ 과거시험 초장엔 포천 선비, 종장엔 장성 선비

그만큼 장성은 예로부터 문필의 고장, 즉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 초장(첫 시험)에는 경기도 포천 선비가 많고, 마지막 시험장인 종장에는 장성 선비가 많다는 '포초장추(抱初長推)'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장성 필암서원.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장성 필암서원.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장성은 선비와 청백리가 많다 해서 호남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도 한다. 추로는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장인데 이를 빗대어 장성이 그렇게 일컬어진 것이다.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 역시 '동국여지지'에서 "(장성) 선비가 문학을 숭상한다(士尙文學)"고 평하기도 했다. 문학은 유학까지 포함한 말이니, 그만큼 장성 선비들이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황룡강을 따라 펼쳐진 비옥한 평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장성은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 필암서원 등 선비 관련 유적들 많아

장성을 대표하는 유림 유산이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온전함을 유지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7대 서원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 중이다.

장성 봉암서원.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장성 봉암서원.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김인후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인과 선현들을 기리는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된 18현 가운데 호남 유일의 선비다.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다가 인종이 승하하자 낙향해 학문을 닦으면서 평생 후학 양성에 힘썼다.

충의와 의리를 통해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김인후의 유학 정신은 호남의 의병운동, 나아가 광주민주화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 1만 개 눈보다 나은 외눈박이 기정진

김인후와 기대승 뒤 호남 유학을 대표하는 노사(蘆沙) 기정진(1798∼1879) 역시 장성 출신이다. 진원면 진원리에는 1878년, 그를 기리고자 건립한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다. 기정진은 호남 유학을 뛰어넘어 조선 성리학 6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여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눈을 실명했지만, 신체적 결함조차도 되레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화로 소개된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조선에 인물이 있는지 알기 위해 '천자의 명'이라며 문제를 냈지만 아무도 푸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박수량의 백비.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박수량의 백비.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이 어려운 문제를 장성의 신동 기정진이 풀었다고 한다. 이에 감탄한 임금과 조정 대신이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一目)'(장안에 있는 1만 개 눈이 장성에 있는 하나의 눈만 못하다는 뜻)이란 말로 기정진을 극찬했다고 한다. 그가 '일목문장(一目文章)'으로 후세까지 불리는 사연이다.

◇ 청렴의 상징 '백비' 공직자 교육의 장으로

장성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유적은 박수량의 백비(白碑). 이곳 황룡면 출신 아곡(莪谷) 박수량(1491∼1554)도 장성 선비의 기개를 전국에 떨쳤다. 조선 명종 때의 문신으로 우참찬·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와 형조판서에 이른 인물이다.

명종 1년(1546)에 동지춘추관사로서 중종실록·인종실록을 편찬했다.

박수량은 공직 생활을 38년간이나 했으면서도 변변한 집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로 청백리로 유명했다.

명종은 박수량이 죽자 크게 슬퍼하며 좋은 암석을 골라 비석으로 하사했다.

그러면서 "박수량의 청렴결백함을 알면서 비에다 새삼스럽게 결백했던 내용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함에 흠이 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라고 명했다.

장성 관수정.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장성 관수정.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임금의 지시로 비문이 없는 특이한 비석이 세워진 셈이다. 장성군은 군청 광장에 백비 모형을 세워두고 공직자들의 모범으로 삼는다.

◇ 맥동과 아치실의 성리학자들

장성 지역 중에서도 황룡면 맥동과 아치실 두 마을은 유독 인물이 많이 났다. 세종 때 보문관 직제학을 지낸 이견의를 비롯해 기대승의 조카 기효간(1530∼1593)과 그의 아우로 임진왜란에 순국한 선무공신 기효근(1542∼1597), 기효간 현손으로 김인후 이후 장성 성리학 맥을 이은 기정익(1627∼1690)이 그들이다.

기효간 5세손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표방한 기정진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 이어져 의병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바탕이 됐다.

필암서원을 중심으로 반경 10㎞ 안에서 호남 유학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태어나고 활동했다. 북쪽으로 7㎞쯤 떨어진 서삼면 모암리 모암서원은 고려 고종 때 효자로 이름난 서릉(徐稜)을 모신 곳이다.

장성 모암서원 칠현유허비.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장성 모암서원 칠현유허비. [장성군 제공=연합뉴스]

필암서원 동쪽 10리에 있는 봉암리에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화차를 발명해 행주대첩을 도운 망암(望庵) 변이중(1546∼1611)이 살았다. 이곳에는 봉암서원(鳳巖書院)이 있다. 필암서원 남쪽 8㎞쯤 되는 광주 광산구 광산동 너부실마을에는 기대승을 모신 월봉서원이 있다.

장성 출신 한학자인 기호철 서울대 고병리연구실 연구원은 "장성은 산골짝이었지만 서울로 통하는 호남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 때문에 중앙의 최신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맥동과 아치실 등에 있는 유학 관련 유적들을 잘 살려 추로지향으로서의 위상을 활용할 방안이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kjsu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12/30 11: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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